비, 이젠 그만 좀 내리라고 해!

7월 하순에 시작한 비가 끝내 홍수로 변하더니...

등록 2002.08.21 14:50수정 2002.08.2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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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하순에 시작한 비가 좀체 끝날 생각을 않았습니다. 하루 한두 차례는 어김없이 비가 쏟아지고, 맑은 하늘을 본 것이 아득한 옛날같이 느껴졌습니다.


지난 방학 내내 빗줄기와 함께 고향에서 보낸 느낌입니다. 그저 잠깐 비가 그쳤을 때 밭에 나가 이것저것 손을 볼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늘 공치는 날이었습니다. 집 뒤 언덕 위에 웃자란 풀을 베는 데 꼬박 4주가 걸렸습니다. 4주 내내 풀을 벤 것이 아니라,한 사흘이면 할 일을 비 때문에 찔끔찔끔 하다 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던 날씨가 방학 끝날 무렵에는 아예 폭우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퍼붓듯이 쏟아진 비는 금세 도랑을 넘치고, 평상시에는 건천에 군데군데 샘물만 흐르던 개울에 무서운 기세로 흘러 넘쳤습니다.

평소에는 건천이던 곳에 넘펴 흐르는 물
평소에는 건천이던 곳에 넘펴 흐르는 물최성수
모처럼 휴가로 찾아온 친구네 가족을 밤중에 돌려보냈습니다. 쏟아지는 기세로 보아 개울을 건너오는 길이 범람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밤새도록 비는 그치지 않고 쏟아부었습니다. 전기가 나가버리니 물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터로 끌어올리는 지하수니 정전에는 대책이 없게 된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빗줄기만 거세게 쏟아지는데, 이러다가는 꼼짝도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며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어슴푸레한 밖으로 나와 보니, 집 앞 개울은 넘칠 듯이 우쭐거리며 흐르고 있었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개울물은 이미 길 위로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집 뒤 산 기슭의 밭에서 쏟아져 내린 물은 배추밭의 기름진 흙을 다 쓸며 이미 작은 개울이 된 길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사태가 난 흙이 밭 가운데에 무덤만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전작(前作)을 하고 묵히던 무밭은 굽이치는 물살이 깎아버려 백여평이 떠내려간 상태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툭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밭 가운데로 무너져 내린 산사태
밭 가운데로 무너져 내린 산사태최성수
그리고 며칠을 우리 가족은 갇혀 있었습니다. 길은 끊어지고, 물은 흘러 넘치고, 좀 가늘어지긴 했지만 빗줄기는 좀체 그칠 생각을 않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찾아 올 수도 없었습니다.


골짜기, 오직 한 채뿐인 우리 집에, 늦둥이 아들 녀석과 아내와 나는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한편으로는 막막하고 한편으로는 느긋하게 갇혀 있었습니다. 사흘 후, 면사무소에서 수해 복구 차 포크레인을 보내 길을 닦을 때까지 말입니다.

물살에 휩쓸려 가버린 밭. 물이 흐르는 곳이 밭이었다
물살에 휩쓸려 가버린 밭. 물이 흐르는 곳이 밭이었다최성수
아랫마을에 살면서 이 골짜기에 와 농사를 짓는 친척 동생들이 며칠만에 올라와서 밭을 둘러보며 한마디했습니다.

"비 온 것치고는 피해가 덜하네요. 남쪽은 더 난리라는데."
그런 말을 하는 동생의 마음에는 같은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어마어마한 비는 처음이에요. 피해가 보통이 아닐텐데."
"이장네 밭은 아예 물줄기가 휩쓸고 지나갔어요."
"사람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요, 뭐."
"그래도 물이 불어나니 경치는 그만이네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불어난 개울물을 보며 동생이 자조적으로 한 마디 했습니다.

평소 물이 전혀 없던 곳. 물이 평소에도 이렇게 흐른다면 이 골짜기는 이미 유원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평소 물이 전혀 없던 곳. 물이 평소에도 이렇게 흐른다면 이 골짜기는 이미 유원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최성수
"평소에 물이 저렇게 흐르면 이 골짜기도 놀러온 사람으로 정신 없을 걸. 차라리 물이 흐르지 않는 게 나아."

다른 동생이 손을 내저으며 고개까지 저었습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평소 이렇게 물이 좋으면 행락객으로 주차난까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더니, 마른 개울이 오히려 골짜기를 지켜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는 동생들의 뒤로 거세게 불어난 물줄기가 여전히 흘러내기고 있었고, 많이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빗줄기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마 밑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밀며 놀던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갑자기 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비 좀 그만 내리라 그래!"

녀석은 하늘을 쳐다보다 제 장난감 자동차를 바라보다 하며 내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벌써 며칠 째, 비가 내려 질어질 대로 질어진 마당에서 놀지 못하게 되니 짜증을 낸 것입니다. 나도 마음 속으로 녀석의 말처럼 이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 이젠 지겹다. 제발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비 때문에 출하하지 못한 동생들의 풋고추와 떠내려간 밭, 심하게 수해를 입었다는 내 친구인 이장네 농사가 생각나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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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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