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그 나라의 역사와 말

등록 2002.08.24 18:53수정 2002.08.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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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우나, 어두어가는 시대에, 혹시나 광명을 찾으렴을, 볼까하야, 이를 비롯한다. 올해의 앞섯것은, 종증조부님에 관한 것과, 아푸리카의 나라, 에치오피아에 관한 것뿐인데, 이는 그햇수를 따라 하고, 올해의 것붙어는 날자를 따라 하련다."

'시대'나 '광명' 따위의 낱말로 인해 여기 인용한 글로만 미루어 보면 대단한 일을 시작하는 선언서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어떤 사람이 신문 스크랩을 시작하면서 그 앞에 붙여놓은 '이를 비롯하면서'라는 제목의 권두언이다.


평민 지식인 이찬갑과 일곱 권의 신문스크랩북

표기법이나 글 끝에 덧붙여진 '일천구백삼십칠년 밝맑 씀'이라는 것을 통해 단박에 일제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 뒤에 있을 신문 스크랩의 내용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것 같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책 <그 나라의 역사와 말>(백승종 지음·궁리 펴냄)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기능한다.

이 스크랩을 한 사람은 '평민 지식인' 이찬갑(1904∼1974)이다. 그의 유명세(?)라면 종증조부인 남강 이승훈을 비롯한 조만식, 김교신, 안창호, 함석헌 등과 교류가 있었고 그 아들 중에 역사학자 이기백, 국어학자 이기문 교수 형제가 있다는 점 등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지금의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도 관여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지식인에 불과했던 그가 이 책에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평민' 이찬갑이 남긴 신문 스크랩북 7권과 철학적, 종교적 논문 몇 편과 시 몇 수, 그리고 아는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매개다.


여기서 이찬갑은 이른바 한국판 '메노키오'가 된다.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미시사의 고전으로 꼽히는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에서 탐구했던 인물 '메노키오'.

그는 16세기의 한 방앗간 주인이었다. 이 방법론의 의도는 그의 세계관을 통해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들여다본다는 즉 미시사적 입장이었다.

바로 이찬갑은 한국의 역사학자 백승종에 의해 구체적인 개인이란 창을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의 복잡 미묘한 관계망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첫 번째 대상이 된다.

이같은 미시사적 관점이 관심을 끄는 전체사적 흐름이라는 이름 아래 바라보는 거대역사는 정작 그 주역인 인간 개개인의 모습이 사라져버리기 쉽지만 일정하게 경계 지어진 지역 내에서 어떤 위기나 사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전략이나 가치관 등을 면밀하게 탐색하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복잡 다단한 리얼리티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착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는 신문 스크랩북은 평민 이찬갑이 당시 구독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이다. 특히 그는 당시 비판적 논조가 강했던 <동아일보> 기사를 주로 스크랩했다.

시작은 1937년 7월14일 '표준말모음집' 간행 소식을 접하면서부터다. 그는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이 없이는 국민을 계몽할 수 없다는 덴마크의 종교가이자 민족 지도자인 그룬트비히의 주장을 중히 여기고 있던 그였기에 이 기사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신문 스크랩에 자신의 단상을 메모해 두었는데, 이 소식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렇게 메모돼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도 어둠을 해치며 광명을 향해 자라나는 모양의 우리말. 내 말! 아, 반가워라. 아가 잘 자라라. 잘 커라."

이렇듯 이 책은 그가 남긴 신문 스크랩을 쫓아가며 그의 내면세계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혹자는 그의 삶을 복원한 평전쯤으로 이 책을 위치지울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판단하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와 사물에 대한 해석이다.

해서 이 책은 이찬갑을 통해 일제시대, 조선의 지식인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았을까에 대한 대답을 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 백승종 / 궁리 / 360쪽 / 15,000

덧붙이는 글 백승종 / 궁리 / 360쪽 / 15,000

그 나라의 역사와 말 - 일제 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백승종 지음,
궁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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