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날, 첫 눈 오시다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46

등록 2002.09.10 10:26수정 2002.09.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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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시간, 수업을 하다 창 밖을 보니 푸슬푸슬 눈이 내린다. 첫 눈이다. 흐린 하늘 가득 새의 깃털처럼 흩날리며 내려오는 눈, 눈발들. 갑자기 마음 착 가라앉는다. 하던 설명을 멈추고, 말없이 창가에 다가간다. 아이들,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갑자기 조용해지고, 내 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아이들 눈길이 창가로 향한다.

잠시 모두들 멍하니 침묵하는데, 한 아이가 탄성을 지른다.
"와, 눈이다!"
그 말이 물꼬를 튼 듯, 아이들 갑자기 우루루 창가로 몰려든다.
"정말."
"첫 눈이네."
"어디, 어디?"
순식간에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창가에 아이들 나뭇잎처럼 매달려 밖을 바라본다.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하늘 가득 덮이는 첫 눈. 첫 눈이 함박눈이면 풍년이 든다던데, 함박눈은 아니지만 제법 눈발이 굵다.
"선생님, 우리 운동장에 나가요."
"눈싸움해요."
아이들이 창 밖과 나를 번갈아보며 조른다.
"이 녀석들, 눈이 쌓이지도 않았는데 무슨 눈싸움이냐."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참, 그렇구나."
눈싸움을 제안한 녀석이 머리를 긁적인다.

눈이 아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나보다. 아이들은 서로 무어라고 웅웅거리며 떠들지만, 그 소란이 평소의 잡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마치 먼 산골 마을의 깊은 겨울 어느 밤, 화롯가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 같다. 한 오 분 남짓, 눈발 그렇게 쏟아지더니,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리고 눈발, 언제 그랬느냐 싶게 뚝 멎는다.

"에이, 뭐 이래."
"한참 퍼부을 것 같더니...."
아이들은 아쉬운지 볼멘 소리다.
"자, 이제 그만. 수업 계속하자."
내 말에 오늘따라 아이들이 고분고분하다. 복도 쪽에서 창가로 몰려갔던 아이들도 제 자리로 돌아온다.

눈이 사람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일까? 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평등의 세상, 사랑의 순간을 만들던 눈발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간다.

세상살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퍼붓다 금세 그치는 눈발 같은 것.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그렇게 첫눈이 환상처럼 왔다 간다. 그리고, 내 생의 길고도 짧은 한 순간도 그렇게 지나간다. 십일월, 첫 날, 첫 눈은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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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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