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 하는 날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47

등록 2002.09.13 07:56수정 2002.09.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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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바람이 제법 맵다. 교무실, 낡은 난로에 달라붙듯이 다가앉아도 온김이 별로다. 나는 부시시 일어나 보던 책을 곁의 책상에 던져두고, 꿀꿀이죽통에서 부서진 의자와 책상다리를 꺼내 난로에 집어넣는다. 이제 잠시 더운 기온이 피어오를 것이다. 이 커다란 교무실을 덥히기에는 터무니없이 여린 온김일 테지만.

선생들은 교무실 난로가에 놓인 장작 넣는 통을 꿀꿀이죽통이라고 불렀다. 꼭 옛날 돼지죽을 담는 통처럼 둥글고 쭈글쭈글한 양철통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죽통에는 아이들 손에 부서진 책상이나 걸상 조각들이 채워져 있다. 톱밥을 숯처럼 만들어 놓은 이른바 톱밥 연로를 넣는 중간에 그런 나무 조각들을 곁들여 넣으면 그래도 불길이 제법 괜찮았다.

나는 나무를 넣은 난로가에 앉으며, 처음 부임하던 날을 떠올린다. 의자에 파묻힐 듯 앉아있던 대머리 교감과, 난로가에서 바둑을 두던 선생들, 그 중 하나가 일어나 주섬주섬 집어넣던 이 부서진 책걸상 조각들이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벌써 이 학교에서 한 해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월 말이다. 이제 이월 초면 개학이고, 두어 주 수업을 하면 또 봄방학이고, 그러면 한 해가 마무리된다. 세상의 달력은 십이월이 한 해의 마무리지만, 학교의 달력은 이월이 되어야 한 해가 끝난다. 모두 조금씩 세상에 지치고, 또 자신이 속한 사회에 길들여지면서, 그렇게 중학교 아이들의 한 해, 교사의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인지 나른하다. 함께 당직인 오 선생은 할 일이 있다더니, 자기 부서인 상담실에서 두문불출이다. 덕분에 나는 나른한 겨울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불땀이 조금씩 오르자 난로 주위가 점점 따사롭다. 고양이라도 한 마리 있으면, 난로가에 기대 눈을 살포시 감을 것 같은 온도다. 보던 책이 자꾸 침침해지고,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진다. 나는 그만 책을 덮고, 의자를 거꾸로 돌려 등받이에 이마를 대고 한 잠 청한다. 나른하다. 그리고 마음 차분히 가라앉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어린 시절, 뒷뜰에 땀이 나도록 패 놓던 장작 더미가 갑자기 나를 덮치기도 하고, 교감이 들어와 당직을 어떻게 하는 거냐며 소리치기도 하고, 어 출출한데 우리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어쩌구 하며 말뚝이가 김치찌개 냄비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온갖 잡꿈 사이로 머리 한 켠이 멍하게 비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퍼뜩 잠에서 깼는데, 어느새 난로의 온기는 김빠진 맥주처럼 밍밍해졌고,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남짓 꿈속을 헤맸다.

나는 얼른 일어나 난로 뚜껑을 열고 톱밥 연로를 집어넣는다. 그러자 사그라질 듯 하던 바알간 불기가 파시식 살아난다. 고개를 몇 번 휘둘러보고, 기지개를 켜다가 찬바람이라도 쐬려는 생각으로 교무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다.


복도를 돌아, 현관 쪽으로 방향을 틀다 나는 그만 감탄사를 내뱉고 만다.

"아!"

흰 눈이 거기 하늘 가득 퍼붓고 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잿빛으로 변한 하늘에서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다. 벌써 눈이 내린 지 꽤 됐는지, 운동장에는 흰 눈밭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본관 주변으로 이어져 있는 화단에도 온통 눈이 가득하다. 거기 서있는 배롱나무에도, 꽃사과나무에도, 봄이면 남 볼세라 먼저 흰 꽃을 터트리던 벚나무에도 이제는 벚꽃 대신 눈꽃이 활짝 피어있다. 잿빛 눈발 사이로 보이는 운동장 건너 아름드리 버즘나무에도 눈송이가 얹혀 있다.

이제야 겨울이 겨울 같군. 나는 눈발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러는 사이에도 눈은 내려 쌓인다. 운동장 귀퉁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쓰레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 옆, 부수다 남겨둔 건물 잔해에도 눈이 쌓인다.

주택조합이 결성되었다고, 그래서 아파트를 짓는다며 멀쩡한 집들을 때려부수더니, 무엇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었는지, 어떤 건물은 반쯤 부수다 남겨놓았고, 또 어떤 건물은 아예 멀쩡한 채로 비어있기도 한데, 흉물스럽던 그곳에도 눈이 쌓인다.

주택조합 결성 축하라고 쓴 현수막에도 눈발이 흩뿌린다. 눈에 거슬리던 것과 눈에 들던 것 모두에 눈은 내리고, 내려 쌓이고, 그래서 눈이 보기에 어떤 것 하나도 없이 모두 평등하다. 저 순백의 평등한 나라 가운데에 내가 서있다.

나는 운동장 가운데 서서 내리는 눈발을 온 몸으로 맞는다. 나도 평등한 세상의 사물 중 하나가 되어본다. 이 눈발 속에 지난 일년동안 아이들과 내가 쌓아온 온갖 불평등의 나날들이 모두 묻혀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하염없이 눈발을 바라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그런 나를 눈발 속에서 멍하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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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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