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식 위원장ⓒ2002 우리쌀지키기100인100일걷기운동
쌀 시장 개방으로 농민들이 절망하고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그런 생각이나 우려,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자본주의 의식'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쌀 시장이 개방되면 왜 농민이 절망하는가? 소비자들이 싼 외국쌀을 사 먹고 비싼 국산 쌀을 사 먹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누가 쌀 농사를 짓겠는가? 그러니 국내의 쌀 농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어찌 절망하지 않을 것인가?―이런 생각일까? 틀린 말도 아니고 물론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 옳은 말이요 어쩌면 정확한 예측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쌀 시장이 개방되면 그렇게 되겠지. 아마도 많은 농민들이 쌀 농사를 포기할 것이다. 벌써 그런 현상은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예측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쌀 시장 개방으로 쌀 농사를 그만두는 농민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가 쌀 농사를 그만두는 까닭은 무엇일까?
더 이상 쌀이 돈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그날, 행진에 동참하셨던 이 땅의 늙은 농부 김복관 선생의 한 마디가 만주 벌판의 북소리처럼 내 가슴을 치면서 아직도 울리고 있다.
"식량 문제로 난리가 난다 해도 농부에게는 땅이 있으니 근심할 까닭이 없다. 걱정을 해야 한다면 농부들보다 도시 소비자들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대 '자본주의 의식'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말의 뜻은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으로 바꾸어지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게 자본주의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시방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나 침대뿐만 아니라 땅도 물도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기술이나 아이디어까지도 모두가 돈으로 계산되어 시장에서 거래된다. '지적 소유권'이야말로 갈 데까지 간 자본주의가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독버섯이다.
이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어찌 농부의 머리라고 해서 점령 대상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돈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될 쌀 농사를 걱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나라 농부들 머리와 가슴에서 '쌀=돈', '쌀 값=농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근거'라는 악마적 자본주의 등식이 말끔히 씻겨지지 않는 한, '쌀 시장 개방=농업의 파탄'이라는 등식 또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젊은 농부 정경식 선생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이토록 울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말했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우리는 시방 자본주의를 거슬러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쌀 시장 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쌀 시장 개방을 핑계로 더 이상 '돈' 되지 않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결정하는 농부 바로 그에게 있는 것이다. 반대로 희망이 있다면, 쌀 시장 개방을 막아서 외국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쌀은 곧 생명인지라, 죽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어서 논 갈고 모내기하는 농부, 바로 그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 귀 기울여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