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시방 자본주의 거슬러 걷는다"
쌀 개방 앞둔 농부들의 절망과 희망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이현주 목사 기고

등록 2002.09.19 10:54수정 2002.09.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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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부터 농업 회생의 염원을 담은 우리쌀 지키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쌀지키기 농업회생연대 준비모임'(공동대표 도법스님)이 주최하고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 조직위'가 주관하는 전 국토 1800킬로미터 도보순례. <오마이뉴스>는 이 운동을 후원하며, 100일 동안 농업회생의 대장정을 생생하게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풍경소리> 발행인이자 동화작가, 영성지도자, 생명농업인인 이현주 목사님이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으로 보내주신 글입니다. <편집자 주>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중·고등학생, 청년들이 많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빗속을 뚫고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에 참여했다. ⓒ2002 우리쌀지키기100인100일걷기운동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중·고등학생, 청년들이 많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빗속을 뚫고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에 참여했다.ⓒ2002 우리쌀지키기100인100일걷기운동
농업회생연대가 이끌어가는 <우리쌀 살리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에 하루 참가하여 옥천에서 대전까지 걸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서부터 중·고등학생, 청년들이 60여일 동안 전남북, 경남북을 거쳐 1천km를 넘게 걸어서 드디어 대전 땅을 밟는 날이었다.

그 동안 많은 비가 내렸는데 그 빗속을 뚫고서 쉬지 않고 걸었단다. 내가 왜 남들이 볼 때 '대책없는 낙관'을 품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게 사실은 터무니없는 낙관이 아니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기분좋은 날이었다.

새까만 얼굴 새까만 종아리에 두 눈알을 반들거리는 계집아이가 '우리 쌀을 지킵시다'라고 쓴 전단을 행인들에게 나눠주고 식당에 들어가 밥 먹는 이들에게 돌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깡충깡충 뛰면서 20킬로미터 하루 행진을 마무리 짓고 있다. 저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내일을 비관하고 절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은 그래서, 2004년에 개방될 것이라는 쌀 시장을 '우려'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쌀 농사를 비롯하여 한국 농업이 망하고 말 것이며 그러기에 절망에 빠져 있는 농민들을 도와달라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은 가슴 뭉클하게 하는 것이면서도 마음 깊이 동의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고,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역시 희망하고 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절망이나 희망은 어떤 상황에 있는 게 아니라 주체인 사람에게 있다는 얘기다.

쌀 시장 개방이 이 나라 농민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같은 상황에서 왜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배전의 용기로 일어서는가? 절망과 희망이 상황에 있지 않고 사람한테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등대 향해 자본주의를 거슬러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정경식 위원장 ⓒ2002 우리쌀지키기100인100일걷기운동
정경식 위원장ⓒ2002 우리쌀지키기100인100일걷기운동
쌀 시장 개방으로 농민들이 절망하고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그런 생각이나 우려,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자본주의 의식'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쌀 시장이 개방되면 왜 농민이 절망하는가? 소비자들이 싼 외국쌀을 사 먹고 비싼 국산 쌀을 사 먹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누가 쌀 농사를 짓겠는가? 그러니 국내의 쌀 농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어찌 절망하지 않을 것인가?―이런 생각일까? 틀린 말도 아니고 물론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 옳은 말이요 어쩌면 정확한 예측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쌀 시장이 개방되면 그렇게 되겠지. 아마도 많은 농민들이 쌀 농사를 포기할 것이다. 벌써 그런 현상은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예측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쌀 시장 개방으로 쌀 농사를 그만두는 농민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가 쌀 농사를 그만두는 까닭은 무엇일까?

더 이상 쌀이 돈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그날, 행진에 동참하셨던 이 땅의 늙은 농부 김복관 선생의 한 마디가 만주 벌판의 북소리처럼 내 가슴을 치면서 아직도 울리고 있다.

"식량 문제로 난리가 난다 해도 농부에게는 땅이 있으니 근심할 까닭이 없다. 걱정을 해야 한다면 농부들보다 도시 소비자들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대 '자본주의 의식'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말의 뜻은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으로 바꾸어지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게 자본주의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시방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나 침대뿐만 아니라 땅도 물도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기술이나 아이디어까지도 모두가 돈으로 계산되어 시장에서 거래된다. '지적 소유권'이야말로 갈 데까지 간 자본주의가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독버섯이다.

이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어찌 농부의 머리라고 해서 점령 대상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돈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될 쌀 농사를 걱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나라 농부들 머리와 가슴에서 '쌀=돈', '쌀 값=농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근거'라는 악마적 자본주의 등식이 말끔히 씻겨지지 않는 한, '쌀 시장 개방=농업의 파탄'이라는 등식 또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젊은 농부 정경식 선생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이토록 울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말했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우리는 시방 자본주의를 거슬러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쌀 시장 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쌀 시장 개방을 핑계로 더 이상 '돈' 되지 않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결정하는 농부 바로 그에게 있는 것이다. 반대로 희망이 있다면, 쌀 시장 개방을 막아서 외국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쌀은 곧 생명인지라, 죽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어서 논 갈고 모내기하는 농부, 바로 그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 귀 기울여 들어봅시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월 중순이면 서울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고, 이 행진이 성인 어른들보다 더 많은 수의 '미성년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희망이 쏟아오른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월 중순이면 서울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고, 이 행진이 성인 어른들보다 더 많은 수의 '미성년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희망이 쏟아오른다.100인 걷기운동
여기, 일본의 한 농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이오덕 선생이 일본 그리스도교 애진고등학교가 펴낸 문집에서 옮겨 <글쓰기> 9월호에 소개한 글이다. 애진학교 학생들의 모내기를 돕기 위하여 온 농부 후지이씨는 "이제 곧 30대로 들어가는" 젊은이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심으려고 하는 논이 있는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벼농사를 하는 사람이 줄기만 합니다. 나는 그 가운데서 벼농사만 하는 단 한 사람입니다. 자연 속에서 일하는 것이 농사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낭만스럽게 느껴집니다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논에 들어가면 외로운 노동이 이어집니다.

지금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논은 40장입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벼농사를 그만두게 되면 저기 보이는 저 논처럼 곧 황폐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논이 가지고 았는 저수력(물을 가두어 놓고 있는 힘)은 잃어버리고, 하천의 중류·하류에 홍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논농사를 하고 있는 것은 홍수라는 자연의 재앙을 막는 일의 한가닥을 맡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이 나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몇 %라 생각합니까? 30%입니다. 30%란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열 사람 가운데서 일곱 사람이 외국 사람이 지어 놓은 것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사실을 뜻하는지 여러분은 알겠지요.

마지막으로 모를 심을 때는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다해서 심어주세요. 아무렇게나 심으면 쌀도 아무렇게나 됩니다. 식물에도 마음이 전해집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잘 자라다오' 하고 말해 주면서 정성껏 심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월 중순이면 서울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고, 거기서 행진은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나는 이 행진이 성인 어른들보다 더 많은 수의 '미성년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가슴 벅찬 희망을 느꼈다.

아빠 따라 3천킬로미터 대행진에 참여한 평화꼬마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 앞에서, 쌀 시장 개방이야말로 무슨 터무니없는 허풍선이란 말인가? 겁낼 것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겁낼 물건이 아니다. 적어도 그것을 삶의 원리로 삼아서 살지 않겠다는 옹골찬 결심으로 쌀값이야 오르든 말든 내 땅 갈아 내 양식 만들어 먹겠다는 참농심의 참농부에게는 쌀 시장 개방 따위 정말로 겁낼 물건이 아니다.

이 땅의 농업이 죽는다면, 그 원인은 도시 소비자들이나 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이 땅의 농민에게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 땅의 농업이 산다면 쌀 값 안정(?)이 아니라 참농부의 참농심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가 서울을 반환점으로 삼아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진도를 향해서 다시 힘차게 흐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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