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여 그루의 나무들이 만들어 현대인의 휴식처- 약 6만5천 평에 이르는 대지에 1백여 종(種) 약 2만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상림은 이 지방 사람들은 물론 여타 지방 사람들에게까지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요즈음에야 홍수조절댐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지만, 1천여 년 전 사람들이 홍수를 막기 위해 이런 둑을 쌓았다니 그 마음이 대단하다.권기봉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또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온 상림. 그래도 상림은 외롭지 않다. 함양 상림에는 상림 그 자체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말기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에 전국적으로 세운 척화비가 상림의 새 주인인 공설운동장 입구 부분에 서 있고, 1923년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는 후손들의 비인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와 함양 이은리에서 출토된 석불, 함양읍성 남문으로 쓰이던 함화루(咸化樓; 남문으로 쓰일 당시의 이름은 망악루(望岳樓))가 상림과 함께 하고 있다.
한편 함양 읍내에는 '학사루(學士樓)'라는 규모가 제법 큰 누대가 하나 있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자광이 김종직을 부관참시까지 하게 되는데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학사루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고향이 근방 남원이었던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쓴 시가 현판으로 만들어져 학사루에 걸려 있던 것을 보게 된 김종직. 남이 장군을 무고하게 죽음으로 몰기까지 했던 '모사꾼' 유자광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김종직은 이를 바로 떼어내 불태워 버렸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자광은 분노하게 되지만, 아직은 자신이 김종직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처지인지라 그저 앙심을 품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무오사화가 터지면서 사건은 벌어지게 된다.
| | | 그런데 함양 '상림'엔 어떻게 가지? | | | | 상림에 가기 위해서는 경남 함양으로만 가면 된다. 일단 함양으로만 가면 상림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함양 군청에서 병곡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되는데, 교통 표지판이 잘 되어 있으니 찾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고, 상림을 지나가는 시내 버스도 많으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상림에 직접 가보겠다는 의지와 생수 한 병, 지도 한 장 챙기는 일! / 권기봉 | | | | |
즉 김종직이 《성종실록》의 〈조의제문〉에 단종을 가엾어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하는 투의 글을 쓴 것을 본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이를 고자질함으로써 영남 사림의 거두였던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신진사림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한편 사약을 받게 되었고, 유자광은 나아가 이전의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때 이미 명을 달리한 김종직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관을 쪼개고 목을 치는 등의 부관참시를 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학사루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당시의 비극을 느낄 수 있는 길은 없다.
부연하자면 지금의 이 누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당시 함양관아에 지어졌던 것을 1979년에 관아가 있던 함양초등학교에서 이리로 옮겨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