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쑥부쟁이' 처녀가 살았습니다

가을꽃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들

등록 2002.10.01 16:09수정 2002.10.0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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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쑥부쟁이최성수
지난 여름 내내 집 주위를 환하게 밝혔던 개망초꽃과 달맞이꽃이 다 지고 난 자리에 이제는 가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갈대들도 제 몸 속에 감추어 두었던 대궁을 내밀어 가을을 맞을 채비가 한창입니다.


이미 붉나무 잎들은 이름대로 붉은 빛을 조금씩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했고, 작은 텃밭에 심은 고추 잎들도 한 여름의 싱싱함을 가라앉히고, 제 빛깔을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주말마다 찾는 고향집에서 늦둥이 진형이는 늘 새로운 자연과 맞닥뜨리는 것이 경이로운지, 갈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꺼내놓곤 합니다. 이미 봄부터 외워온 집 앞 나무 이름은 이제 손님들이 찾아오면 제 스스로 가르쳐주기까지 합니다.

"저 나무는 느티나무고요, 저건 벽오동, 저건 산수유, 그리고 이건 무궁화야."

아이가 재잘재잘 나무 이름을 주워 섬기는 것을 보고, 보리소골 우리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감탄 반 놀림 반으로 한 마디씩 합니다.

"진형이 너 시골 다니더니 촌사람 다 됐구나!"


지난 여름, 자전거를 타고 개울가로 쏜살같이 달려간 아이가 잠시 후 개망초꽃과 달맞이꽃을 몇 송이 꺾어 돌아오더니 제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엄마 선물이야. 예쁘지?"


환하게 웃으며 꽃을 내미는 아이의 모습이 꽃보다 아름다워 빙그레 웃고 있는데, 아이가 물었습니다.

"이 꽃은 이름이 뭐야?"
"개망초."
아이 엄마가 얼른 대답을 해주자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 개망초야?"
대답이 궁한지 아이 엄마가 저를 바라보며 눈짓을 하였습니다.
"원래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인 국화과의 꽃인데, 초나라가 망할 때 많이 피었다고 해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있지."
내 설명에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아이가 알아듣기나 하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진형이 녀석은 그냥 고개를 끄덕입니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답변을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달맞이꽃
달맞이꽃최성수
녀석이 이번에는 달맞이꽃을 내밀며 물었습니다.
"이 꽃은 이름이 뭐야?"
"달맞이꽃."
"왜 달맞이꽃이야?"
"너 밤하늘에 떠 있는 달님 알지? 그 달님이 뜬 밤에 꽃이 피어난다고 해서 달맞이꽃이란다."

이번에는 아내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당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개망초꽃. 달맞이꽃."
꽃 이름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나봅니다.

지난 주말에 내려가 본 고향집에는 이제 마타리꽃이 조금 남아 있고, 들판 가득 쑥부쟁이가 한창이었습니다.

아이는 들길을 걷다가 어김없이 꽃 이름을 묻습니다.
"이 꽃은 뭐야?"
"쑥부쟁이란다."
나른한 햇살과 산 위에 툭 떨어져 있는 구름 그림자를 바라보다 나는 그만 쓸쓸해져서 나직하게 대답합니다. 아이는 여리고 순한 꽃이 마음에 드는지 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묻습니다.

"왜 쑥부쟁이야?"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대장장이가 살았습니다. 자식은 많고 일거리는 적어 늘 배를 곯아야 하는 살림살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대장장이의 큰딸은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날 무렵이면 언제나 바구니를 끼고 들판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쑥을 캐서 동생들에게 먹이기 위해서였지요.

사람들은 그런 큰딸을 보고 쑥부쟁이라고 불렀답니다.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의 딸이라는 뜻이었지요.

어느 날 쑥부쟁이는 깊은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습니다. 한참 나물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노루 한 마리가 쑥부쟁이 앞으로 달려오더니 푹 쓰러지는 게 아니겠어요. 쑥부쟁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는데, 노루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쑥부쟁이에게 무언가 애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노루는 다리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아이고 불쌍해라. 얼마나 아프겠니. 잠시만 기다리렴. 내가 약초를 구해다 고쳐줄게."

쑥부쟁이는 산 속에서 약초를 구해 노루의 발에 발라주고, 제 치마를 찢어 묶어주었습니다.

노루는 몇 번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구슬 세 개를 꺼내 쑥부쟁이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소원을 들어드리는 신비한 구슬입니다. 구슬 하나를 입에 넣고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노루는 그런 말을 남기고 겅중겅중 뛰어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쑥부쟁이는 잠시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했지만, 꿈이 아니라는 듯, 쑥부쟁이 앞에는 세 개의 구슬이 놓여 있었습니다. 쑥부쟁이는 구슬 세 개를 품에 품고 다시 나물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숲 속 어딘가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쑥부쟁이는 귀를 기울여 소리나는 곳을 찾았습니다. 소리는 숲 길 한 켠 땅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쑥부쟁이는 소리나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움푹하게 구덩이가 파여 있었는데, 소리는 구덩이 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으으으. 아이구 다리야. 누구 없소? 나 좀 살려주시오."
쑥부쟁이가 내려다보니 사냥꾼 한 사람이 구덩이 속에 쭈그리고 앉아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쑥부쟁이는 얼른 숲으로 가 칡덩굴을 걷어다 엮어 밧줄을 만들어내려보냈습니다. 사냥꾼은 그 칡덩굴을 잡고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냥꾼은 잘 생기고 훤칠한 청년이었습니다. 쑥부쟁이는 그만 사냥꾼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냥꾼 청년도 쑥부쟁이의 청초한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양에 사는 사람이오. 내 반드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다시 돌아와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겠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사냥꾼 청년은 그런 말을 남기고 한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부터 쑥부쟁이는 자나깨나 청년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청년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쑥부쟁이의 어머니가 그만 큰 병에 걸려 눕고 말았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던 쑥부쟁이는 문득 노루가 준 구슬이 생각났습니다.

쑥부쟁이는 얼른 구슬을 하나 입에 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세요.'
기도가 끝나자마자 쑥부쟁이의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언제 앓았냐 싶게 기운도 차렸습니다. 쑥부쟁이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쑥부쟁이는 나머지 구슬 두 개를 보자 다시 사냥꾼 청년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구슬 하나를 물고 또 소원을 빌었습니다.
'사냥꾼 청년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자 쑥부쟁이의 눈앞에 금방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청년은 쑥부쟁이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양에 올라가니 부모님께서 따로 정혼해 놓은 아가씨가 있었어요.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가 없었답니다. 지금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지요."

청년의 말을 들은 쑥부쟁이는 맥이 쑥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자기처럼 남편을 기다릴 사냥꾼의 아내를 생각하고 얼른 나머지 구슬 하나를 입에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그만 한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눈앞에서 사냥꾼이 사라졌습니다. 쑥부쟁이의 마음 속에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이 대신 자리를 잡았습니다.

쑥부쟁이는 그 뒤로는 다시는 사냥꾼 청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 때문에 날마다 산 속을 헤매며 산나물을 뜯거나 약초를 캐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산 속을 헤매던 쑥부쟁이는 그만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던 사람을 지운 마음이 너무도 헛헛해서 세상 살 기력을 잊어버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이듬해 봄, 쑥부쟁이가 떨어져 죽은 벼랑 아래에는 풀이 소복하게 돋아났습니다. 그 풀은 쑥쑥 자라 한 여름의 땡볕과 빗줄기를 견뎌내더니 가을에 청초한 꽃을 피웠습니다. 마치 쑥부쟁이를 닮은 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꽃을 쑥부쟁이라고 부르며, 쑥을 캐러 다니던 대장장이의 딸 쑥부쟁이를 생각하곤 했답니다.

나는 아이에게 쑥부쟁이꽃에 얽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아직 아이가 그 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고, 이야기의 정서적 울림도, 쑥부쟁이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쑥 캐던 어떤 누나가 죽어서 이 꽃이 되었단다. 그래서 쑥부쟁이야."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맙니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쑥부쟁이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날이 있으려니 그렇게 생각하고 맙니다.

마타리꽃
마타리꽃최성수
그런데 아이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건너뛰고 있습니다. 아이는 마타리꽃을 보며 묻습니다.
"이건 마타리야."

지난 여름에 가르쳐준 꽃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해낸 것입니다. 아이는 마타리를 툭 쳐보더니 또 묻습니다.
"마타리꽃은 왜 마타린꽃인 줄 알아?"

나는 마타리가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몰라 그냥 고개만 가로젓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응, 우리 보리소골에 사람들 많이 오라고 마타리야."

방학 내내, 주말이면 거의 대부분 보리소골에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아이는 어쩌다 우리 가족만 있게 되면 묻곤 합니다.

"오늘은 보리소골에 누가 안 와? 누가 오면 좋겠는데."

그런 대답을 들으니, 사람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꽃 이름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아 내 마음조차 순해집니다.

그렇지, 이름이야 어떻든, 그 꽃에 담긴 사람의 마음이 더 소중하겠지,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잘 자라주면 좋겠구나. 나는 가을꽃들을 바라보며 아이에 대한 그런 마음을 기도 대신 중얼거립니다. 정말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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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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