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사이로 날아오르는 '연치'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5> 코스모스와 연치

등록 2002.10.08 12:09수정 2002.10.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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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코스모스

코스모스 ⓒ 우리꽃 자생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 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하중희 작사, 김강섭 작곡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혹시 김상희라는 가수를 아십니까?


요즈음 가수나 배우처럼 그렇게 이쁜 얼굴이 아니고, 그렇다고 마치 5백원짜리 동전처럼 작고 귀여운 그런 얼굴도 아닌, 지극히 촌스러움이 철철철 묻어나는 그런 얼굴을 가진 여가수. 하지만 코스모스를 꼭 빼 닮은 여자. 간혹 4일장이 서는 날, 장터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인정 많은 마을 누님 같이 생긴 그 여자.

늘 단발머리, 아니 당시 유행했던 말로는 그런 머리를 바가지 머리라고 불렀다. 맞아, 늘 그 바가지 머리를 하고 나와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웃으며 우리의 마음 곳곳에 코스모스가 마구 피어나게 하던 그 여자...


통통한, 당시 우리가 보기에 꼭 보기 좋은 그런 몸매에 코스모스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는 허리를 가진 그 가수. 한번쯤 꼬옥 안겨보고 싶었던 그 여자.

그래. 해마다 산하가 단풍으로 불타기 시작하면, 아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이맘때만 되면 늘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바로 김상희가 부른 그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다.

가을날,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그래서 종이가 글씨 모양처럼 볼록볼록 패여져 너덜거리기까지 하는 우리들의 일기장 한 페이지를 늘 장식했던 그 노래... 우리 마을 아이들 누구나 신작로 곳곳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꺾으며 부르던 그 가을 노래의 대명사... 마을 가시나들이 빨강, 하양 코스모스 꽃잎과 잎새를 책갈피 속에 이쁘게 끼우면서 흥얼거리던 그 노래...

그래. 해마다 가을이 깊어가면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부르던 그 가수, 김상희란 이름을 가진 그 여자의 환한 코스모스 빛 웃음이 떠오른다. 아니 코스모스 속의 동그란 금빛 꽃술처럼 환하게 웃던 김상희, 코스모스 꽃잎 같은 김상희의 그 빠알간 입술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물 같은 코스모스 손바닥 사이를 투두둑- 투두둑- 튀던 그 연치... 그래, 일반인들은 '연치'라고 하면 잘 모를 것이다. 우리들이 연치라고 부르는 것은 표준어로 방아깨비였다.

a 방아깨비

방아깨비 ⓒ 우리꽃 자생화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방아깨비를 연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들판 곳곳에서 떼떼떼- 거리며 나는, 그러니까 연치처럼 생긴 그 작은 연치를 '새끼 연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은 누구나 연치를 메뚜기의 큰엄마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메뚜기의 증조부쯤으로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연치들이 모두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메뚜기, 그러니까 우리들이 부르는 말로 그 '메떼기' 비슷한 것은 크게 두 종류였다.

연치와 메떼기 그리고 귀뚜라미와 베짱이... 당시 우리들은 그들이 각각 사돈과 팔촌지간쯤 되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귀뚜라미와 베짱이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귀뚜라미와 베짱이도 메떼기와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먹을 수 없는 곤충이었기 때문이다.

또 연치는 우리들이 부르는 말 그대로 큰 연치와 새끼 연치 두 종류였다. 하지만 메떼기는 그 종류가 세 가지였다. 야트막한 산에 주로 살며 발에 톱니 같은 것이 달려 있는 것은 톱메떼기,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벼 잎사귀를 주로 갉아먹고 사는 것은 논메떼기, 그리고 톱메떼기처럼 주로 야트막한 산에 살면서도 온몸이 쥐빛인 것은 도둑넘메떼기...

당시 우리들이 주로 잡은 것은 코스모스 사이를 투둑, 투둑 튀어다니는, 아니 가끔은 노오란 날개를 펼치며 새처럼 푸더더더 날기도 하는 그 연치와 논메떼기였다. 우리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비우신 한 되짜리 초록빛 빈 소줏병 속에 그 연치와 메떼기를 잡아넣었다.

연치는 주로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신작로 근처의 풀밭에 많이 있었고, 논메떼기는 말 그대로 벼가 익어가는, 또는 벼를 베어 말려둔 볏단 위를 투두둑, 투두둑거리며 수없이 뛰거나 날아다녔다. 또한 우리는 그 연치와 메뚜기가 투두둑, 투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벼가 옹골차게 익어가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우리들의 가을은 연치와 메떼기를 잡는 계절이었다. 또 그렇게 소주 댓병 가득히 연치와 메떼기가 가득 들어찰 때면 가을날 오후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렇게 기우는 것은 아니었다.

마산쪽 하늘에 시뻘건 불이 번지면서 그 드넓은 남면벌과 마을이 온통 붉은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그렇게 붉게붉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마산쪽 하늘에 한 점 불빛처럼 남은 해가 장복산 아래로 쏘옥 빠지고 나면 들판과 마을이 마치 검붉은 불 속으로 마구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검붉은 노을을 문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신작로... 코스모스의 그 얇은 허리가 혹시 바람에 부러지기라도 할까봐 조심하며 마을로 돌아오던 그 가을날 저녁...

a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 우리꽃 자생화

우리들의 얼굴에도, 드문드문 기운 옷자락 속에도, 메뚜기가 기득 찬 아버지의 소줏병 속에도 온통 불이 붙고 있었다. 그래, 그때쯤이면 우리는 서둘러 마을을 향해 마구 뛰었다. 불꽃처럼 벌건 이를 드러내고 깔깔거리며 뛰었다.

또, 그렇게 잡은 연치와 메떼기들은 그날 저녁상에 푸짐하게, 아니 김치를 밥상 구석으로 제치고 당당하게 밥상 가운데 올랐다. 그날 저녁은 쌀알이 간혹 하나씩 섞여 있는 그 시커먼 보리밥을 두 그릇씩이나 먹었다.

그리고 신작로에서 꺾어온 그 코스모스는 우리들의 방 안 가득히 가을을 심었다. 꽃병은 당연히 아버지가 비우신 그 소주 댓병이었다.

제법 오스스하게 추운 그 가을밤, 나는 군불을 땐 따스한 방안을 환히 밝히는 그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나지막히 불렀다. 그리고 마치 짝사랑이라도 하듯이 김상희라는 그 여가수의 얼굴과 그 새빨간 입술을 코스모스 속에 살포시 떠올리곤 했다.

코스모스는
나보다 훨씬 큰 키로 섰다

언제나 환한 웃음
누나 같이 서 있다

잠자리를 쳐다보고
살풋 날고 싶어 하다가

비행기 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린다

학교 운동회가 보고 싶어 피는
코스모스는

숨바꼭질하러 온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오덕 '코스모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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