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 돌확 하나에도 깃든 아름다움

[서향만당7] 최순우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록 2002.10.11 20:11수정 2002.10.1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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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희언의 《인왕산도(仁王山圖)》. 종이에 담채한 것으로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24.6cm x 42.6cm

강희언의 《인왕산도(仁王山圖)》. 종이에 담채한 것으로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24.6cm x 42.6cm ⓒ 권기봉

모 방송사의 독서 진흥 프로그램 선정도서로 지정되어 때아닌 복에 겨운 전(前)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미술과 조형이 갖는 고결한 미를 한껏 칭송하고 있다.

그의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맛을 느낄 수 있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역시 위 책을 낸 '학고재'에서 펴낸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으로, 내용 면에서 지은이의 전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a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으로, 화첩종이에 채색한 것이다. 28.2*35cm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으로, 화첩종이에 채색한 것이다. 28.2*35cm ⓒ 권기봉

즉 전작이 주로 우리 것이 갖는 미(美)에 대한 찬가였다면, 이 책은 혜곡의 그런 심미안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책표지가 심플하면서도 운치가 도는 이 책 역시 지은이 사후에 나온 것으로 각종 신문이나 회보 등에 실렸던 글들을 간추려 엮은 것이지만, 전체 5장에 걸쳐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3장과 5장이 인상적이었는데, 3장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면서 서울 집에 남겨둔 바둑이에 대한 사무치는 미안함과 지은이가 어렸을 적 집안 노비였던 조재구 씨에 대한 평가 등이 그의 인간미를 가늠하게 해준다.

a 최순우/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최순우의 한국미 사랑/학고재/2002

최순우/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최순우의 한국미 사랑/학고재/2002 ⓒ 권기봉

한편 책의 마지막 부분인 5장은 일단 장의 이름부터가 '조선의 미남미녀'로 외모를 숭상하는 요즈음 사람들의 귀에 솔깃하게 들릴 만하다. 그러나 그가 인정하는 미남과 미녀는 작금의 우리가 보는 그런 미남미녀와는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 각종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풍기는 멋에 대한 평이 주를 이루는데, 지금의 우리가 주로 겉모습에 의지한 '미모'를 중시한다면 그는 풍채나 얼굴, 차림새에서 우러나오는 '잘 생긴' 모습에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뜰 앞에 그저 이지러진 돌확 하나, 김장철 연둣빛 무순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혜곡. 그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의 성정과 익살을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서점에 들러보자.

기억하고픈 이 한마디의 구절
최순우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中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이건 조형의 아름다움이건 남보다 더 알아볼 수 있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눈일수록 남이 못 느끼는 추한 것과 지저분한 것을 아울러 새김질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p. 15,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中)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pp. 17~18,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中)

"기실은 불란서에 가서 나의 개인전을 갖기 전까지는 그 곳 작가들 그림에 물들까 봐서 전람회 구경도 안 다니고 나를 지키느라 매우 애를 썼다" (p. 114, '수화 김환기 형을 생각하니' 中 김환기의 말)

생각해 보면 예술이란 하루 아침의 얄팍한 착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재치가 예술일 수는 더욱이 없는 일이다. 참으로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일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p. 118, '장욱진, 분명한 신념과 맑은 시심' 中)

"표현은 정신 생활, 정신의 발현이다. 표현이 쉽고도 어려운 것은 자기를 내어놓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물감만을 바른다 해서 표현일 수 없으며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낸 고백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p. 119, '장욱진, 분명한 신념과 맑은 시심' 中 장욱진이 쓴 〈표현〉에서)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 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옛말이지만 '고생을 사서 한다'라는 모던한 말이 있다. 이 말이 꼭 들어맞는다. 그림과 술로 고생하는 나나 그런 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내 처나 모두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좋은데 어떡하나.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 한다. 평생 자기 몸을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p. 120, '장욱진, 분명한 신념과 맑은 시심' 中 장욱진이 쓴 〈그림과 술과 나〉에서)

세상 사람들이 '체골이 체골이'하는 체골이 같은 사람이 바로 조재구 씨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어질게 생긴 얼굴 모습이나 술 한잔 좋아한 것밖에는 마누라도 없이 평생을 비단결같이 곱게 늙어 간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아마 조재구 씨는 마음속으로 젠체하는 세상 사람들을 꾸짖으며 '체골이 체골이' 부르면서 살아왔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하면 과연 누가 체골이였던가. 그 나름의 굽힘 없는 무슨 철학 같은 것이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것만 같다. (p. 134, '한잔 술로 늙어 간 체골이' 中)

어느 날 하루 종일 어울려 놀던 모기와 하루살이가 저녁때가 되어서 헤어질 때 모기가 하루살이더러 "얘, 내일 또 만나자"하니까 하루살이가 어리둥절해서 "내일이 뭐야?"했다는 이야기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고 그리고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오늘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p. 140,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은 여인의 죽음' 中)

요사이는 집을 지으려면 대개 자연의 지형을 마구 헐어 내고 깔고 돋우고 해서 멋진 자연 풍광을 학대하는 일이 예사로 되어 있지만, 과거의 한국 사람들은 결코 자연을 거역하는 그러한 무모는 최소한도로 줄이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었다. 그러한 까닭에 창덕궁이나 경복궁을 보아도 잔잔한 언덕이나 작은 계류 그리고 궁원을 누비는 그 오솔길들을 무시한 흔적이 매우 드물다. (p. 169, '낱낱으로 본 한국미' 中)

동양의 산수화, 즉 요샛말로 풍경화 속에는 그 어느 위치엔가 유유히 자연 속을 소요하는 한 인물이 있거나, 초당이나 정자에 홀로 앉아 고요히 사색을 즐기는 인물이 있을 때가 많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풍경화란 서양 풍경화에서처럼 화가가 바라본 자연의의 일각을 묘사한 그림, 즉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끼고 또 두루두루 돌아보며 즐기는 입장을 택한다는 말이 된다. (pp. 196~197, '임당 백은배의 〈기려도〉' 中)
/ 권기봉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최순우의 한국미 사랑, 개정판

최순우 지음,
학고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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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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