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디 목숨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7> 해바라기

등록 2002.10.15 16:14수정 2002.10.15 20:2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 우리꽃자생화(강천)

아버지!
울 밑에 전봇대처럼 훌쭉하게 자라 옆집 장독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해바라기의 노오란 꽃잎이 말라붙고 있습니다. 그리고 까만 빛이 점점이 박힌 노오란 꽃술도 갈색으로 말라붙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의 찬란한 해이자 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 4남1녀의 자식들은 의지처인 아버지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저 해바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들의 그 찬란한 희망이자 해인 아버지가 바알간 노을을 놓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놓으신 그 바알간 노을에 물들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들에게 아버지는 늘 중천에 떠있는 해였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란 해가 기운다는 그런 꿈은 한번도 꾸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저 푸르디 푸른 하늘이며, 저희들은 그 푸른 하늘을 떠다니다 금새 아버지의 그 넓은 품 속으로 사라지는 뭉게구름이었습니다. 그 뭉게구름이 하루종일 온갖 형상을 그려내듯이 저희들도 아버지의 하늘에서 온갖 희망을 피워올렸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제 울밑에 선 저 해바라기의 시든 꽃잎을 털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까만 씨알들이 질서정연하게 촘촘히 박혀있는 해바라기의 씨알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년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버지에게로 쑥쑥 자라올라 그 찬란하고도 노오란 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부서진 터미네이트 같습니다. 하루는 패혈증 때문에 호스를 꽂았고, 또 하루는 심부전증 때문에 호스를 꽂은 아버지... 마치 문어처럼 온몸에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계신 아버지! 저는 차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a

ⓒ 우리꽃자생화(강천)

아마도 이제 저희 해바라기들은 곧 해를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하늘에 해가 없으면 캄캄한 어둠의 세월만 계속되겠지요. 그리고 이 까만 해바라기 씨앗도, 심을 땅이 있지만 심을 수가 없겠지요. 또한 억지로 심어도 싹이 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그 찬란한 해가 없으니까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키워주신 이 해바라기 씨앗들은 어찌할까요. 아버지가 없는 이 해바라기들은 또 이제부터 무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려야 합니까. 주변 사람들 말마따나 이제 겨우 일흔 다섯이신 아버지!

주변 사람들은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팔순까지 살아야 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이제 그 질긴 목숨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주여, 나를 버리시니이까' 라고 외쳤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온몸에 호스를 달고, 면회조차 시간을 맞춰 가야만 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볼이 움푹 들어간 노오란 얼굴로 중환자실에 누워 잠만 계속 주무시고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이제 진정으로 저희들을 버리려 하시나이까" 라고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젊은 날 동무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하시던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국전쟁 때 그 치열했던 신의주 전투...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몇 개 사단이 포위되어버린, 그 속에 아버지가 속한 그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던, 죽을 뻔했던 그 신의주 전투.

아버지!
쏘아도 쏘아도 자꾸만 튀어나왔다는 중공군과의 그 치열했던 전투를 잊으셨나요. 그리고 그 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이 보낸 그 큰 배, 원산항에 닿은 그 큰 배에 오르시던 때를 잊으셨나요.

그때는 미군이 아버지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희 자식들이 아버지를 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그 배를 타고 목숨을 구했듯이 이제는 자식들이 내미는 이 생명의 배에 오르십시오. 그렇게 그만 목숨을 놓으려 하지 마시고, 어서 자식들이 보내는 이 가족의 배에 오르십시오.

한국전쟁 때 의무하사로 참전했던 아버지! 어느날, 부상 당한 한 병사를 들것에 들고 오시면서 "와 이래 무겁노?"라고 하신 아버지.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고 일어난 그 병사는 바로 아버지의 고향 동무였다라고 하신 아버지. 그리고 그 동무께서는 늘 술잔을 기울이기만 하시면 아버지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저와 제 동생이 아버지 곁을 밤새 지키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초췌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지 못해 자꾸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포장마차에 나가 예전에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소주를 컵에 따라 마셨습니다. 라면을 안주 삼아.

a

ⓒ 우리꽃자생화(강천)


아버지!
올해는 해바라기 꽃씨가 유난히 까맣습니다. 마치 보석처럼 까맣게 빛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해가 기울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지는 해를 잡지 못하고 안타까이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해가 없는 해바라기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4남 1녀 중 막내이자 꼭 하나뿐인 여동생이 병원 문을 나서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또 한번 소주 한 병을 컵에 따라 마셨습니다.

아버지! 부디 목숨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아니 이 세상살이가 그렇게 힘이 드신다면 이젠 그만 목숨의 끈을 놓으십시오. 만약 아버지께서 그렇게 목숨의 끈을 놓으시고 나면 저희들의 세상은 한바탕 울음바다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묻히신 그 산소에 아버지를 묻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일이 되면 늘 그래왔듯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어떻게 살아오신 삶입니까. 부디 목숨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희들이 던지는 이 생명의 밧줄을 꼬옥 쥐고 부디 예전처럼 저희들 곁으로 다가오십시오. 저희들은 해가 없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