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살은 '열정'이 필요한 나이다

소림이와 은화의 사회적 자아의 눈뜸에 대하여

등록 2002.10.16 18:12수정 2002.10.22 09:49
0
원고료로 응원
a 순천에서 열린 벽화그리기에 참가한 아이들

순천에서 열린 벽화그리기에 참가한 아이들 ⓒ 김인경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동네 비디오방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영화여서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기도 합니다. <녹원의 천사>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연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학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주말이면 가족끼리 텔레비전 앞에 앉아 '토요명화'를 보고, 뒤이어 아버님의 영화평을 듣곤 했는데 그때 본 영화 중에 한 편인 듯도 합니다.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녹원의 천사>의 주인공은 열일곱살 소녀입니다. 극중 인물도 그렇고, 실제 영화 배우의 나이도 그러했습니다. 그 영화의 매력은 실제 나이 열일곱살에 영화를 찍은 리즈 테일러의 몽상적인 청순함에 있기도 합니다.

그 영화에는 제 가슴인지 이마인지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영원히 잊지 못할 두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두 장면을 유난히도 잊지 못하는 것과 제가 교사라는 직업을 택하기 위하여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첫 교단을 밟기까지 먼 길을 돌아온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초원에서 말타기를 좋아합니다. 틈만 나면 말을 몰고 초원을 달립니다. 그래서 <녹원의 천사>입니다. 소질도 있었는지 마을 경마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큰 대회에서의 우승을 꿈꾸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딸이 말을 타고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아지자 그것이 여성스럽지 않다든지, 위험한 놀이라든지 하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장차 돈이 되지도 않을 일에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예기치 못했던 장애를 주인공의 어머니가 해결해줍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의 열일곱 시절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 있었나요. 지금 저 애가 바로 열일곱의 나이를 지나고 있어요. 열일곱살은 쓸데없는 열정이 필요한 나이잖아요?"


제 기억을 애써 복원하고 거기에 창작력을 곁들여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가 정말 오고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딸에게 해준 말과 혼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주인공은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딸이 우승을 하게 되고 흥행업자들이 달라붙자 아버지는 돈이 되겠다 싶어 딸의 경마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됩니다. 이때 어머니가 조용히 딸을 만나 이쯤에서 경마를 그만둘 것을 종용합니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딸이 하도록 배려해줍니다. 결국 딸은 어머니의 뜻을 따릅니다. 물론 어머니의 뜻이 자신의 뜻과도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준 말도 제 가슴 어딘가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로새겨진 것은 그 정신이지 언어가 아니어서 한 번 더 부실한 기억력에 창작력을 곁들여, 조금은 현대식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여 재구성해봅니다.

"넌 열일곱살 소녀야. 아직은 쓸데없는 열정이 필요한 나이지. 이제 경마는 너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장사가 되고 말았어. 사람들이 너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고. 나는 네가 벌써부터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보이는 것이 싫구나. 아빠에겐 내가 말씀드릴 테니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거라."

딸은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동안 경마로 인해 소홀히 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한껏 달라져 있음을 스스로 느낍니다. 과거처럼 학교 성적을 올리기 위해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지식을 갈망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자발적인 공부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열일곱 나이에 필요한 또 하나의 쓸데없는 열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 학교 소림이와 은화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소림이와 은화는 올 해 나이 열일곱입니다. 그들은 지난 여름방학 동안 순천청소년축제 팀과 함께 동천 벽화 그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벽화는 순천지역 미술교사가 중심이 되어 가로 45m, 세로 3m 공간에 밑그림을 만들고 7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채색 작업을 하여 완성이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 회색도시에 숨결 불어넣는 아이들

a 벽화를 그리고 있는 아이

벽화를 그리고 있는 아이 ⓒ 김인경

그런데 그 작업기간 동안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싶게 엄청난 비가 내렸습니다. 다행히도 벽화가 그려지는 그곳이 마치 다리 밑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비를 맞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큰비로 인해 자전거 도로까지 물이 넘치고 나중에는 그림이 그려질 벽면까지 물이 차 올라 애써서 그린 밑그림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방학중 특기적성교육을 받고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벽화 그리기 작업에 매달린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가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불법 보충수업과 강제 자율학습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상당수의 학교가 오후 늦게까지 학생들을 학교에 붙잡아두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더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학 후 소림이와 은화의 변화된 모습을 지켜보면서 방학 동안 그들이 결코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눈빛이 달랐습니다. 저는 그들의 눈빛에서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과 자신감이었고,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싶어하는 사회적 자아의 눈뜸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변화가 처음에는 무척 신기하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벽화 그리기 작업을 하는 동안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자기 뱃속에 들어갈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일컬어 속물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서 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 삶을 계획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몸이 야위도록 헌신한다는 것, 그것은 입시위주 교육에 사로잡힌 우리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소림이는 올해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고, 은화는 학예부장이 되었습니다. 소림이가 출마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그의 언어의 진실함에 대하여 새삼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헛된 공약을 남발하는 기성 정치인을 그대로 빼다 박은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낙후된 학생문화를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의 흔적 같은 것들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은화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학교 신문에 실릴 시를 한 편 달라고 했습니다. 가만 보니 옆구리에는 편집 노트 같기도 한 것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학교 신문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막힘 없는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학교 신문이 학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소림이와 은화를 통해서 저는 청소년 시절에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아이들을 밤늦도록 학교에 붙잡아두는 것은 사회적 자아의 눈뜸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쓸데없는 열정이 필요한 열일곱의 눈부신 나이를 이제 그 주인공들에게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인경 기자님의 <회색도시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을 보시면 순천청소년축제 동천벽화그리기에 관한 기사와 소림이와 은화가 축제위원들과 함께 벽화그리기 작업을하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인경 기자님의 <회색도시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을 보시면 순천청소년축제 동천벽화그리기에 관한 기사와 소림이와 은화가 축제위원들과 함께 벽화그리기 작업을하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