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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만에 고향에 와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고향 땅에 어연번듯하게 세워진 문예회관의 대공연장 무대에서 정식 독창회를 갖는 그의 심정은 얼마나 행복하고 감개무량할까?
공연장 안에서 나는 간헐적으로, 어쩌면 줄곧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문은 물론 그것 자체로서 해답일 터였다.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그런 말들 외로는 다른 어떤 표현도 필요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제(22일) 저녁 충남 태안의 '태안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는 참으로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태안 출신 성악가인 테너 심송학(沈松鶴) 교수가 고향 땅에서는 처음으로 갖은 독창회였다. 정식 명칭이 '고향 방문…테너 심송학 교수 초청 예술가곡 독창회'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태안군이 주최하고, 태안중학교와 태안고등학교 총동창회가 후원한 행사였는데, 나는 공연장 안에서 이날도 태안군 당국에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9월 태안군문예회관이 완공되어 개관을 한 이후로 태안군은 문예회관의 활용도를 높이고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문화예술의 향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크고 작은 많은 공연들과 전시회들을 기획하고 시행했다. 1년 사이에 참으로 괄목할 만한 행사들이 많이 있었다.
문화예술의 실질성에 대한 태안군의 그런 의지 속에서 이번 심송학 교수 초청 독창회도 마련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행사는 태안고등학교 출신으로 심송학 교수의 1년 선배인 최문환 태안군 부군수가 직접 관여한 일이기도 해서 나는 고교 동기동창인 최 부군수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컸다.
심송학 교수는 태안고등학교 제3회 출신으로 나와는 1년 후배가 되는 분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는 노래에 큰 소질을 보였고, 학교 행사 때마다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성악가 심송학 교수의 노래를 청소년 시절부터, 다시 말해 아주 일찍부터 들을 수 있었던 행운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시절이 벌써 30년하고도 몇 년이 더 보태진 세월 저 너머로 달아나 버렸다니….
심송학 교수는 서울 음대를 나와 독일에서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했고, 귀국 후에는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1983년부터 경북대 음대 교수로 발령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때는 경북대 음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모두 열두 번의 독창회를 열었고, 이번 고향 방문 독창회가 열세 번째 공연이라고 했다.
나는 몇 년 전에 KBS의 '열린 음악회'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지난 6월 월드컵 대회 때는 한국과 미국의 경기 전에 그가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그 모습들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심송학 교수가 고향을 떠난 지 30여 년만에 처음으로 고향 땅에서 공연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크다. 물론 그가 30여 년만에 처음 고향 땅을 밟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동안 내가 그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는 가끔 고향을 다녀가기도 했을 터이고, 고향을 다녀갈 때마다 고향에서의 공연도 꿈꾸었을 것이다. 그 꿈이 진작에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마땅한 공연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그와 나 사이에는 서로 연락이 있어서 그는 내게 자신의 노래가 담긴 CD들을 보내 주기도 했는데, 그는 이번에도 고향에서의 공연 기획이 마련된 단계에서 내게 미리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런 연유로 그와 나 사이에는 그의 이번 고향에서의 첫 독창회를 좀더 풍미할 수 있는 방안이, 즉 내 '축시' 낭송 사항이 자연스럽게 협의될 수 있었다.
태안초등학교와 태안중·고등학교의 가까운 선후배라는 인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고향을 지키고 사는 덕으로 나는 심송학 교수가 고향에서 처음 갖는 '예술가곡 독창회' 자리에 나아가서, 즉 공연 중간에 무대에 올라가서 간단한 환영 인사말과 함께 '축시'를 낭송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이었다.
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심 교수의 고향 방문 공연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내가 공연 중간에 축시 낭송을 하게 되어서만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에서의 공연이 대성황을 이룬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진심으로 소망했다. 고향 사람들이 그를 최대한 따뜻하게 대해 주는 풍경이 연출되기를 기대했고, 유명 가수에 의한 대중음악 공연 때는 공연장이 미어지면서도 순수예술이나 본격음악 공연 때는 공연장이 썰렁한 상태가 되고 마는, 그런 불균형적인 상황이 다시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참으로 컸다.
평소 생활 리듬의 하나인 화요일 저녁 미사 참례를 포기하면서까지 온 가족이 음악 관람을 하기로 했다.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야간자율학습 불참을 부담스러워하는 딸아이만을 제외하고 팔순이 다 되신 어머니까지 걸음을 하셨다.
심 교수는 공연 중간의 휴식 시간 전에 외국 노래 세 곡과 우리 노래 네 곡을 불렀고, 10분간의 휴식 후에는 역시 외국 노래 세 곡과 우리 노래 네 곡을 불렀다. 우리 노래들은 모두 귀에 익은 노래들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노래들을 성악가의 육성으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깊은 가을의 한 저녁 일상의 때에 찌든 사람들의 심혼을 차분히 다독이고 정화시켜 주는 듯한 해맑은 음성의, 실로 주옥 같은 노래들이었다.
그리고 심 교수는 앙코르 노래 세 곡을 부르는 사이사이 고향에 대한 추억, 청소년 시절의 일화, 태안군문예회관에 대한 칭송과 문화예술의 가치 등에 대해서 짤막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는 휴식 시간 직전에 무대에 오를 수가 있었다. 심 교수가 휴식 시간 전의 마지막 곡인 <산들바람>을 부르고 나서 간단하게 내 소개를 했다. "고향을 지키고 사시면서, 고향 땅에서 순수문학을 아울러 지키고, 고향의 정신문화를 위해 헌신하시고 계시는…"이라는 그의 말에 실로 고마운 마음이 컸다.
모자를 벗고 관객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나는 "여러분의 시력 보호를 위해 모자를 쓸 테니 양해해 달라"는 말을 한 다음, 심 교수의 고등학생 시절 모습을 간단히 소개했고, "빈자리가 많은 공연장의 풍경에서 오히려 순수예술과 본격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새롭게 되새긴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심 교수의 이름자의 뜻과 그의 고향 마을인 '정주내'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지은 축시 <정주내의 산들바람>을 낭송했다. 그 시는 내가 당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의 맑은 정신으로 지은 시였다.
시낭송을 마치고 나서 별도로 준비해 간 시를 적은 종이가 담긴 봉투를 가슴 주머니에서 꺼내 심 교수에게 주면서 보니, 옆에서 손뼉을 치는 피아노 반주자 강중수 교수가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공연 후에 갖지 않을 수 없었던 한가지 아쉬운 일은 심 교수가 부인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부인은 그가 독일 유학 시절에 만난 분이라고 했다. 남편이 모처럼 고향을 방문해서 고향 땅에서 처음으로 갖는 독창회이니 그 자리에 부인도 함께 와서 잠시 무대에 올라 남편의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 한번 한다면 얼마나 좋은 모습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어머니께서 더욱 섭섭해하는 사항이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다음 기회에는 꼭 부인을 동반하기를 심 교수에게 부탁하는 마음을 전하며, 자신의 고향에서의 첫 독창회 자리에 내 축시 낭송을 끼워준 심 교수의 아량과 배려에 감사하면서, 내가 정성껏 지어 낭송했던 축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정주내의 산들바람
―심송학 교수의 고향방문 예술가곡 독창회를 찬하며
고향에 머물러 사는 덕에
거의 매일 백화산을 올라
고장의 모습을 보고 또 보는 것이
아주 질감 좋은 낙이 되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고장의 모습들 속에는
변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정주내의 풍경이
여전히 정주내로 남아 있었다
이름이 왜 정주내일까?
천수만의 은밀한 물 끝이 마련해 준
정박의 안온함은
늘 내일의 꿈을 간직하는 휴식이었다
그 정주내의 호젓한 소나무 숲에는
언제부턴가 학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윽고 천년의 날개를 펴서
천수만의 하늘
태안반도의 하늘을 힘차게 날더니
그는 마침내 저 대양을 품에 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갯마을의 전설을 간직한
정주내의 호젓한 소나무 숲에는
지금도 여전히 학이 살게 되었다
세상을 웅비하는 학이 있으므로
정주내는 새롭게
학마을의 전설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천년 예술의 혼을 안고 날아와서
정주내의 고향 숲에 내려앉은,
고향 숲을 떠났으되 떠나지 않은
정주내의 자랑스러운 학을 본다
천수만의 물 끝을 밟고 돌아와
정박의 닻을 내린 배인 듯
잠시 날개를 접고 앉은
학의 안온한 휴식을 본다
정박과 휴식은
내일의 항해와 비상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여정
고향 정주내의 정박 속에서도
여정을 계속하는 그를 보며
정주내의 소나무 숲
밤골의 밤나무 밭에서 불고 있는
산들바람의 이유를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것이
천년 예술의 혼을 펼치고 있는
학의 날개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백화산에서 보는 정주내의 풍경이
예전과 똑같으면서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2002, 10, 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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