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 예지적인 길을

김지하 사상 전집 출판 기념회

등록 2002.10.26 09:58수정 2002.10.29 13:44
0
원고료로 응원
어제 김지하 사상 전집 출판 기념회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일보 사옥 맨 윗층에 있는 송현클럽이라는 곳이 그 장소다. 세상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모처럼 시간을 내 가서 그런지 먼저 와 있던 사람도 많지만 뒤늦게 오는 사람도 많다. 자리를 찾아 앉으려니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찾아와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지하 시인이 어려웠을 적에 사심없이 도와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부영 의원, 김홍신 의원, 김영환 의원 같은 정치인들도 차례로 눈에 띄는데 문학인 출판기념회에 얼굴 비추는 걸 보니 김지하 시인이 명망가는 명망가인 모양이다.


한참 있다 보니 백낙청 선생, 현기영 선생이 들어오고 자리에는 이미 송기숙 선생, 정희성 선생 같은 분들이 앉아 있다. 이경자, 이시영 같은 분도 눈에 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수뇌부'가 통째로 옮겨온 모양새다. 그런가하면 이 단체에서 초청한 베트남 작가동맹 소속 문학인들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소개를 받고 있다. 우연의 소치이지만 국제적인 모양새까지 갖춘 꼴이 되었다.

본래 이렇게 큰 행사는 축하 말씀 해 줄 분도 여럿인데, 뜻하지 않게 백기완 선생이 소개를 받고 단상에 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누군가 김지하가 변절자가 아니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잠자코 인상 찌푸리고 소주만 마시니 옆에 있던 사람이 술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라고 양주를 시키더라는 것이다. 그가 선생에게 양주를 따르고 김지하 운운한 사람에게도 술을 권하는데, 그 사람은 불쾌한 듯 양주는 안 마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에게 다시 왜 대답은 안 해주고 양주만 드시냐고 따지듯 묻더라는 것이다. 꽤나 행세 좋아하는 운동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생이 그랬다는 것이다. 네가 김지하를 아느냐고, 네가 김지하가 살아온 길을 아느냐고, 네가 김지하의 이슬을 아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김지하는 커다란 파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커다란 몰개(파도)가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 포말이 일어나 그 물방울이 지하의 이마에 맺혀 떨어지니, 지금 지하는 그 이슬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서슬이 뻗쳐, 너 이놈, 안기부 끄나풀이 아니냐,고 일갈을 했더라는 것이다.

좌중은 박장대소하였으되 백기완 선생의 이야기 속에 든 뼈를 새겨 들었다. 김지하는 변한 것이 아니라 장강의 물결처럼 도도히 흘러가고 있음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장장 7년 세월을, 유신정권에 굴복하지도 않고 수감되어 있었던 그가 80년대에 들어와 생명을 말함은 시대적 부조응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문학의 본질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간 길이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김형수가 김지하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결별'이라는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한 가수가 나와 김지하의 시에 가락을 붙인 '금관의 예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자 좌중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마지막 순서로 김지하 시인이 다리를 절며 단상에 올라 몇 말씀 하는데 말도 어눌한 데다 논리도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김지하 시인 말고 '실천문학사'라는 곳에서 전집을 내자고 할 때 선뜻 그것을 허락할 만한 명명가가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부 몸을 사리고 이득을 생각하고 문단적인 힘을 의식할 때, 그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 투쟁의 전통이 부담스러운 출판사에서 기꺼이 자기 책을 출판한 것이다. 예전에도 그는 이름 모를 출판사에서 시전집을 출판한 적이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또 생각했다. 김지하 말고 또 누가 있어 서로 성난 이빨을 들이대며 맞싸우고 있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말없는 시간을 보내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지만 갈가리 찢긴 그들 세대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상징적인 힘으로 남아 있으니, 문학이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앞에서 나는 명망가들의 이름을 나열했으나, 그 자리에 모인 문학인들 가운데는 지난 시대를 고뇌하며 살았으되 오늘의 시대를 구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단에서 높게 행세하지 않고 단독자로서, 표표히, 다리를 절며, 자기 사상과 문학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는 김지하라는 존재는, 그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위안이었으리라.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김지하는 내포를 지니면서 무한에 근접하는 흔치 않는 문학이라고. 내포 없는 무한을 과시하는 문학은 김지하류와는 애시당초 그 유별이 다른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4. 4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