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도에 처음 어학연수를 왔을 때였다. 그 해 추석에는 자카르타에서 청소년 축구대표팀의 지역예선전인가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한국과 일본팀이 맞붙었다. 추석에 별다른 할 일도 없던 우리는 단체관람을 했었는데, 다분히 편파적인 심판 판정으로 한국팀이 졌다.
외국에서 애국심은 더 불붙기 마련이라 우리는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이 갔던 선배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경기장을 나가면 다들 조용히 차에 올라타고 빠져나가도록 해라. 괜히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지 말고."
경기장 밖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사자들인 한국인, 일본인들은 모두 소리 죽여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고, 오히려 인도네시아인들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게임에도 상당히 흥분을 하는 편이며, 때로 집단 광기가 발동하면 사고가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양국인들은 경기 중에 고함지르며 응원한 일이 언제였냐는 듯 경기가 끝난 뒤에는 소리 없이 빠져나가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난 것은 오늘 한 한국인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아주머니는 새로 일하기로 한 가정부로 인해 몹시 화가 났다고 한다. 그 가정부가 언어 문제로 일을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가정부가 어떻게 주인 아주머니가 인니어를 못한다고 해서 일을 안 하겠다고 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게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니인들은 외국인이 으레 몇 마디 정도는 인니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외국인이 영어로 물어보는 것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일상적으로 인니어를 구사하며 생활한다. 고위 외교관이나 파견된 기자들 중에 인니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니어로 인터뷰하고, 인니어로 연설을 하는 경우를 아주 자주 본다.
여기서 소위 외국인이라면 대부분 현지인들보다 부유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 속한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은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현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니인들은 개개인은 약해 보이거나 순해 보이지만, 집단이 되었을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거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땅이며,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와 방법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거나, 적당히 이해해주겠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외국인이 그랬다가는 현지인들로부터 집단적으로 항의를 받거나 행패를 당할 우려가 있다.
마을의 노점상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한 한국인은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가, 나중에 패거리로 몰려온 현지인들을 피하려다 지붕까지 올라갔었다는 일화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것은 실화다.
인니는 관습법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사회이다. 그들이 'dendam hati'(이른바 '앙심'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를 품게 하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 함부로 행동을 하다가 현지인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했다는 소문이 그리 드물지 않게 들려오곤 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가 안 되고 어이가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인니인 가정부나 운전기사들은 외국인 고용자가 인니어를 잘 못하면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기가 막히는 꼴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인니어를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도 상당수이다. 현지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받고 살기 위해서는 인니어를 배우는 게 필수인 셈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인도네시아가 자신들의 땅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외국인들이 "나, 외국인이야!"라는 태도로 거만하게 구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외국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언어를 배우고,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할 것을 당연한 일로 요구한다. 때로 나는 앞뒤 재지 않고 너무나 당당한 그들이 부럽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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