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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이 따순 날에 빈 들판을 걷고 있습니다. 야산의 구불구불한 허리를 휘감은 아주 소소한 길입니다. 봄날 마실 삼아 걸었을 때는 민들레가 사방에 깔려있어 함부로 발을 떼지 못했습니다. 꽃대를 밀어 올려 애써 피운 꽃을 밟으면 큰일이다 싶었죠. 깨금발 딛고 조심조심 걸었던 생각에 스르르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비틀거리던 들길을 사방팔방으로 눈길을 던져주며 훨훨 걷고 있습니다.
하얀 솜살을 하늘에 뿌리고 묻힌 민들레의 뿌리를 생각해서 있는 힘껏 땅심을 돋우어 주었습니다. 발끝에 아리게 밟혀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름 수해 탓에 속살 뒤집고 있는 황톳길과 아랫도리 드러내 놓은 나무들의 시린 맨살이 그렇습니다.
순간, 늦은 밤에 걸려온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아범아, 올해 식량은 알아서 사먹어야 쓰겄다. 수해 땜시 몇 가마......”쿨럭이며 말을 못 잇고 끊는 아버지의 빈 손짓이 생각납니다.
갑자기 피톨 선 떡갈나무의 손사랫짓이 슬퍼집니다. 가는 길 도중에 우물 있는 빈 집 하나 만났습니다. 우물가 감나무는 그리움 달아놓듯 홍시 몇 알 매달고, 가지 끝에 앉은 까치 등의 햇살에 깜박 눈이 부십니다.
마지막 남은 홍시마저 떨어지면 비로소 쓸쓸한 가을 풍경 하나 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발길 붙잡는 것이 감나무의 가지 손뿐만이 아닙니다. 여름 내내 불땀 흘렸던 고추밭가의 허수아비 손이 맵습니다.
막무가내로 소맷자락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는 서둘러 겨울채비를 못한 탓이겠지요. 여며줄 옷깃을 찾다 못해 담장 안에 옮겨 주고야 말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몸낮은 시누대 무성한 길을 택했습니다.
소소소 시누대 몸 비비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까닭 모른 산짐승들은 허둥대며 달아나기 바쁩니다. 사방으로 점점 늘어나는 여백을 보고 있습니다. 비움의 쓸쓸함보다는 채움의 넉넉함을 일깨웁니다. 나무들이 이파리를 떨구어 내는 것은 파란 하늘을 채워 새순 돋아날 밑자리를 닦기 위함이고, 들판이 곡식의 밑둥을 잘라내는 것은 바람을 채워 땅심을 다지기 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생각했습니다. 댓잎이 서로의 날을 벼르며 창창하게 겨울을 버티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도 좁아져 춥고 시린 겨울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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