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보러 오셨소? 너무 늦어부렀네"

눈 쌓인 내장산의 단풍을 보고 오다

등록 2002.11.11 16:49수정 2002.11.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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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창밖은 온통 하얀 눈빛입니다. 전나무 가지마다 휘어질 듯 눈이 소복합니다. 지난 겨울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요? 아니요. 지난 주말, 그러니까 11월하고도 9일 밖에 지나지 않은 올 가을의 이야기를 드리는 중입니다.

"단풍 보러 오셨소? 너무 늦어 부렀네. 여기는 벌써 세 번이나 눈이 내렸는디. 하이고, 어디 가서 단풍 보러 왔다는 소리는 하지도 마소. 게으르다 욕 먹을 팅께."


정읍역에서 잡아 탄 택시 기사 아저씨는 연신 제 게으름을 탓하시는군요. 10월 마지막 주, 그리고 11월의 첫째 주가 단풍의 절정이었다 합니다. 사람들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고 하시네요.

계곡 속에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가도 얼만큼의 사람들인지 내장(內臟)에 숨은 듯 알 수 없다 해서 이름도 내장산이라 지은 산 아닌지요. 산은 사람들을 숨길 수 있다 해도, 그 행렬을 보는 것은 참으로 번잡한 일일 듯해서 일부러 미루었던 여행입니다. 헌데, 이른 눈이 먼저 내장산을 덮고 말았다 하는군요.

해가 조금씩 뜨거워지면서 나무 위 눈들이 조금씩 녹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아래에서 사람들은 좋아라 사진을 찍습니다. 눈 덮인 내장산의 단풍은 또다른 장관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저는 '게으른 사람'이라기보다는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 쪽에 더 가까운 듯 합니다. 기사 아저씨로서야 정읍의 최고 자랑을 다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우셨겠지만요.

내장사에 이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절집 마당을 채우고 있습니다. 늦은 단풍 구경이래도 상관없이 즐거워 보이는군요. 자연 앞에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단풍나무 아래서 단풍 세례를 받아보겠다고 손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들도, 수북하게 떨어진 단풍잎 양탄자 위에서 아이처럼 웃는 이들도 세상을 처음 만난 아이처럼 맑고 착한 얼굴입니다. 먼산의 단풍만큼 보기 좋은 풍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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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도종환 선생님이 새로 편 시집 <슬픔의 뿌리>에 '단풍 드는 날'이란 시가 있지요.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가장 황홀한 빛깔로 /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로 이어지는 싯귀들이 바라보이는 풍경과 그렇게 꼭 들어맞을 수가 없습니다.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나무의 절규 앞에서 사람들은 그 절정의 기운을 얻어 새로운 이유들을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삶의 이유, 사랑의 이유, 아픔의 이유,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내장사에서 원적암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평탄하고 다정한 오솔길입니다. 겨우살이, 조릿대, 두릅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동행을 해 주는 덕분이지요. 원적암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능선도 멋지고, 동쪽 기슭을 가득 덮고 있는 비자나무 숲이 또한 일품입니다. 청설모 한 마리가 비자나무 가지에 앉아 제 기색을 살피다가 쪼르르 달려가네요. 녀석에겐 분명히 불청객일 테지만, 이 멋진 숲을 녀석이 독차지하게 두는 것도 너무 샘나는 일이지요?

본디 원적암이 유명한 것은 상아로 만든 와상 때문이었다 하는데, 1910년에 일본인에게 도난당했다 합니다. 운주사 와불에 비견될 정도였다지만, 지금은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랍니다. 원적암을 감싼 숲의 나무들은 그걸 다 보고 있었겠지요. 없어진 와상의 허전함을 대신 채우고도 남지 않느냐, 바람이 그렇게 물으며 저 산기슭으로 불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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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원적암에서 벽련암까지 가는 산길은, 그 맛이 기막히게 좋습니다.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그네가 가진 것 없이 돌아간 집에서 어머니가 내어 주는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게 될 때, 꼭 그 때의 기분일 것만 같습니다. 노랗게 빨갛게 깔린 낙엽을 조금씩 밟으며 걷는 맛,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아껴가며 올려다보는 맛, 폭신폭신 발바닥에 전해오는 부드러운 흙길의 맛.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최고로 아름다운 산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더니, 원적암에서 벽련암 넘어가는 이 작은 고갯마루 또한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내장사에서 백련(白蓮)암으로, 백련암에서 다시 벽련(壁蓮)암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던 곡절 많은 암자에 이르렀습니다. 김정희가 편액을 써서 걸었는데, 6.25 때 불타 버렸다 하는군요.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예년의 규모를 짐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기암절벽을 등에 지고, 사바 세계를 내려다보는 가람 배치가 처음 세울 때의 기세를 느끼게 합니다. 역시, 마당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기슭의 풍경이 일품입니다. 백제 때 환해 선사님께선 참으로 아름다운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려.

산을 내려오는 동안 길을 거슬러, 벽련암에서 원적암으로 가는 이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차가 올라갈 수 있을만큼 너른 길이라 오르기는 쉬울지 모르나, 원적암에서 길을 밟아 내려오는 것이 훨씬 즐거운 산행이라 확신합니다. 혹, 내장산에 들를 일이 있으시거든 제 말 꼭 새겨 주소서.

한낮을 지나 나무를 덮었던 눈은 얼추 다 물로 떨어지고 길바닥을 흥건하게 적셔 놓았습니다. 아침에 보았던 그 눈이 꿈인가 싶을 지경입니다. 전나무 숲은 다시 녹색을 되찾았고, 단풍 이파리들도 말간 얼굴 드러내고 제 색깔로 반짝입니다. 움추렸던 사람들도 나무들도 활기차 보이네요. 두 계절을 동시에 만난 운 좋은 여행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단풍 구경도 조금쯤 게으름을 피우다 와야 할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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