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회의터. 이곳 회의에서 마오쩌둥 등은 중국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조창완
난창 봉기, 영웅들이 모일 자리를 만들어주다
상하이의 한 골방과 지아싱의 호수에서 곡절 끝에 태동한 중국 공산당이 성장하는데는 몇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지만 이 속을 살펴보면 사람들간의 갈등과 우정이 역사를 변화하는 가장 미세한 부분에 존재한다. 그 갈등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의 태동에서 완성까지를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이 처음에 만나는 문제는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국민당과 어떻게 주도권 쟁탈전을 하는 가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 바로 국공합작이다. 북방에 있는 군벌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맺어진 1차 국공합작(1924.1~27.7)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형성된 2차 국공합작(1937.9~45.8)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생존 기반과 생존 여력을 키워줘 중국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줬다.
1차 국공합작은 1927년 장쩨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면서 와해됐다. 공산당이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기 세력 불리기에 들어갔다고 판단해서 급히 이뤄진 이 조치를 통해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처형에는 성공했지만 이 사건을 난창봉기를 촉발시켜 결국 공산당의 세력화에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셈이 됐다. 난창봉기는 결과적으로 위기에 몰린 공산당이 융합해 큰 힘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장쩨스의 상하이 쿠테타이후 이 조치에 불만을 품은 주더(朱德) 등은 3만명의 병사를 동요해 8월 1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의 주도그룹은 저우언라이(周恩來), 류보청(劉伯承), 허룽(賀龍), 예칭(葉挺), 장궈다오(張國燾) 등으로 이후 중국 공산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이들이다. 하지만 봉기는 국민당의 반격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주도세력은 광저우까지 밀렸다가 패퇴한다. 하지만 각 주도자들은 살아남아 계속해서 공산주의 맹아를 키운다. 비록 산이 많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기에 불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여전히 낙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난창은 중국 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시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