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 뒤집어 쓴 배추들의 합창

<현장> 독거노인 김장 담그기 1박 2일

등록 2002.11.19 17:23수정 2002.11.1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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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5분.
"여보세요. 좀 늦겠네요. 삼양동 사거리인데, 막혀도 너무 막혀서요."
월요일 아침. 막혀도 너무 막힌다. 도로가 막혀 택시기사에게 빨리 좀 가자고 재촉도 못한다. 속만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올 겨울 들어 가장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날, 김장을 담근다니. 기자는 자비의집 김장담그기에 참여하겠다고 미리 약속을 한 게 약간 후회되었다. 철썩 같이 약속을 해 안 갈 수도 없고 무겁게 나선 걸음이었다.

날씨는 나날이 추워진다. 하루, 하루 목숨조차 이어가기 힘든 독거노인의 삶. 그들은 화려한 서울, 그 그늘에 감춰진 채 이 겨울 끼니를 걱정하고 구부정한 늙은 한 몸 쉴 곳을 걱정하며 살고 있다. 따뜻한 손길이 자주 찾아와도 추위는 가시지 않을 텐데, '강북 뉴타운' 개발 계획은 이들에게 걱정만 더할 뿐이다.

기자가 찾아가는 자비의집은 바로 이 외로운 독거노인들이 밀집한 미아6동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사회복지시설이었다.

a 고추가루를 뒤집어 쓴 배추들의 합장

고추가루를 뒤집어 쓴 배추들의 합장 ⓒ 이주원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간신히 도착한 자비의 집 정문 앞엔 언뜻 보기에도 대당 천포기씩 배추를 실은 트럭이 두 대나 턱하니 서 있다. 자비의 집 간사 석환씨가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빨간 작업장갑을 건네준다.

"트럭이 도착한지 꽤 됐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오기 전까지 빨리 배추를 풀어야지 안 그럼 제 시간 안에 김장을 못 담가요."


말 끝나기 무섭게 석환씨가 트럭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배추를 내던진다. 날아오는 배추를 한 단, 한 단 쌓아 올린다. 한 다섯 접이나 내렸을까, 자원봉사자 열댓명이 자비의 집에서 부엌칼을 들고 내려왔다. 그들은 땅바닥에 배추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배추뿌리를 칼로 잘라내고, 배춧잎을 다듬고 절반으로 갈라서 소금물에 절인다. 한숨 돌릴 짬조차 주지 않는다.

배추를 바닥에 풀면서 옆에서 봉사하는 보살님께 넌지시 말을 건네 본다.


-안 추우세요. 이 추운 날 왜 고생길을 택했나요?
"안 춥긴. 춥지. 그래도 어떻게, 와서 일손을 도와야지."

-봉사활동에 보람을 많이 느끼시나 보네요?
"내 손으로 담근 김치가 어려운 노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봐. 없던 보람도 생기지."

a 주인만 기다리는 김장 김치들

주인만 기다리는 김장 김치들 ⓒ 이주원

보살님을 말벗 삼아 추위를 이겨보고자 하는데, 어느새 할아버지 한 분이 내 곁으로 와 일손을 거든다. 미아6동에 사시는 할아버지 같은데 뭐하시는 분인지 파악이 안 된다. 잠깐 짬을 내 물 한 모금 마시다가 석환씨에 누구냐고 물었다. 자비의집으로 식사하러 오시는 독거노인인데 공짜로 얻어먹기 미안하다고 항상 자비의집 대소사를 거든다고 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 승가도 잃어버린 백장스님의 가르침을 이름 없는 한 노인이 실천하고 있었다.

현장취재 왔는지. 막노동판에 팔려 왔는지. 도무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몸뚱이를 움직였다. 기자는 사실 자비의집에 도착한지 한시간도 못되어 취재는 잊어버리고 막노동꾼으로 변신해 하루종일 막노동만 하였다.

어느새 어른 키를 넘겼던 배추들이 소금물에 절여져 고무통에 담겼다. 독거노인 김장담그기를 대민지원 나왔던 상근예비역들이 눈이나 비 올까 겁나 김장거리가 담긴 고무통을 비닐로 덮고 묶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 김장거리는 자비의집 봉사자들의 온정 덕분에 안 얼고 겨울바람을 이겨내리라.

a 어르신 손수레에 김장을 싣고 어디로 가시나요?

어르신 손수레에 김장을 싣고 어디로 가시나요? ⓒ 이주원

다음날 아침, 전날 고된 노동 덕분에(?) 늦잠 한 번 잘 잤다. 푹 잔 것까지는 좋았지만 허겁지겁 달려가는 기자의 꼬락서니가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보살님들 틈에 끼어 갖은 양념에 배추를 버무리기 시작했다. 고춧가루를 뒤집어 쓴 배추들이 합창을 한다. 보살님들도 신명이 났는지 어느 결에 노래자락 한 자락을 읊조린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노래 소리에 노동이 고된 줄 모르고 김장을 담그는데, 어르신들이 한 둘 모여들더니 자비의집 문 앞에 줄 서 계신다. 아마 김장 김치를 받으러 온 것 같다. 왜 이리 빨리 나와 추위에 고생하느냐고 물었더니, 한 자원봉사자가 "아직 나눠주려면 2시간 남짓 남았는데도 못 받을까봐 안달이나 먼저 나오셨다"고 귓속말로 알려준다.

양념 묻은 배추를 버무리던 손조차 씻을 짬도 없이 어르신들 곁으로 다가가 넌지시 여쭈었다.

- 이 김장김치가 얼마나 도움이 되세요?
"난, 하루 한끼 먹어. 벌이도 없어서 뭐 해먹을 수는 없지. 이런 곳에서 나눠주는 반찬이 전부야. 더구나 겨울엔 돈이 많이 들잖아."

a 도대체 어디서 살란 말입니까? 저 큰 아파트엔 우리가 누울 방 한 칸이라도 있나요?

도대체 어디서 살란 말입니까? 저 큰 아파트엔 우리가 누울 방 한 칸이라도 있나요? ⓒ 이주원


a 김장김치 봉지 하나 달랑들고 쓸쓸하게 걸어가시는 어르신

김장김치 봉지 하나 달랑들고 쓸쓸하게 걸어가시는 어르신 ⓒ 이주원

현재 미아동은 재개발이 한참 진행중이다. 말하진 않지만 재개발 때문에 점점 살 곳이 줄어드는 게 여간 걱정되는 눈치들이다. 그나마 미아6동은 재개발이 안 되었다. 이 곳마저 재개발이 시작되면 이 어르신들은 어디로 갈까? 힘없는 노인들이 추위와 힘겹게 싸우면 김장 나눠주길 기다리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자비의집 트럭에 거동이 불편해 김장김치를 직접 받으러 오시기 힘든 노인들에게 나눠 줄 김치가 실렸다. 대충 헤아려 봐도 다섯 접, 오백포기가 넘어 보인다. 어느새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검은 매연이 뿜어 나온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석환씨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기자에게 한 마디를 내던진다.

"내년에도 이 김장김치를 배달해드렸으면 좋겠어요. 내년에도 김장을 갔다드릴 수 있다는 건, 아직 어르신들이 이 산동네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덧붙이는 글 | 도시 재개발은 사회적 약자에게 엄청난 폭력입니다. 돈 좀 있는 사람들에겐 새 집에서 살기 때문에 좋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헌 집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도시 재개발은 사회적 약자에게 엄청난 폭력입니다. 돈 좀 있는 사람들에겐 새 집에서 살기 때문에 좋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헌 집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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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많은 기사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묻혀버리고 맙니다. 그들의 이야기, 감춰진 이야기를 발굴해서 다루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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