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전쟁 피해를 알린다

반전만화 <맨발의 겐> 저자 나카자와 게이지 내한

등록 2002.11.26 00:10수정 2002.11.26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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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原)>은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만화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민중의 처참한 삶과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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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게이지. 그는 피폭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데도 간담회 내내 곧은 자세로 기자들의 질문에 응했다. ⓒ 오마이뉴스 김지은

모든 '리얼리티(reality)'는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아무리 많은 간접 경험도 그것을 대신하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맨발의 겐>은 리얼리티가 살아 펄떡이는 만화다.

리얼리티 전쟁 만화의 고전 <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게이지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 8월 국내에서 완역된 데 이어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에서 뮤지컬로 무대에 올려진 것이 계기다.

<맨발의 겐>에 속속들이 배인 리얼리티의 힘은 저자 자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인 나카자와의 피폭 경험을 산고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카자와는 자신이 6살 때인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아버지와 누이를 잃어야했다. 자신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아직도 '당뇨병'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처음 한국을 찾은 그가 25일 오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 1시간 30여분 동안 시종일관 곧은 자세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맨발의 겐>은 나카자와 자신의 피폭 경험만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니다. '반전주의 연극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아버지의 반전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런 그가 이젠 자신의 딸에게 자신이 그린 만화를 통해 그 정신을 물려주고 있다.

나카자와 게이지와 <맨발의 겐(原)>

나카자와 게이지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으나 가정형편상 중학교 졸업 후 간판가게 견습사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후 독학으로 만화를 시작, 22살에 <울트라맨>의 작가인 가즈미네 다이지에게 사사한다.

그의 데뷔작은 1968년에 발표한 <검은비를 맞으며>. '검은 비'는 원폭투하 이후 히로시마에 내렸던 '죽음의 비'인 낙진이 묻은 시커먼 빗방울을 상징한다. 반전반핵을 다룬 작품. 이후 나카자와 작품의 시금석 역할을 하게 된다.

<맨발의 겐>은 1973년 잡지 <소년 점프>에 연재되기 시작, 14년만인 1987년 전 10권으로 완간됐다. 국내판은 지난 8월 재일교포 2세 작가인 김송이(56)씨가 완역했다.

동명의 뮤지컬은 지난 1996년 7월 도쿄에서 초연된 이후 지금껏 230여회 공연됐다. 한국에는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주최로 서울 서대문 문화일보홀에서 처음 올려졌다. / 김지은 기자
"딸에게 반전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어린 딸 앞에 내 만화를 조용히 가져다주었다. 딸은 책을 읽고 나더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나카자와가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만화'라는 친근한 미디어야 말로 전쟁의 피해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

<맨발의 겐>은 이제까지 일본에서만 5천만권이 팔렸다. 이는 우리나라의 한 해 만화 발간부수인 4천만권보다도 많은 수다.

다음은 나카자와가 간담회에서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

- 지난 8월 국내 완역 기념 출간행사 때는 오지 않아 섭섭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건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현재 건강상태는 어떠한가.
"피폭자들 대부분이 후유증으로 당뇨병에 시달린다. 나도 마찬가지다. 8월에는 증세가 심해서 오지 못했다. 이번에는 출간 기념 겸 뮤지컬이 올려지게 돼 방문한 것이다. 건강상태는 여전하나 행사가 행사인만큼 좀 무리를 해서 왔다. 그렇지만 한국에 꼭 오고 싶었기 때문에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 "20%의 논픽션과 80%의 픽션에 기초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 예를 들면 겐의 아버지가 군국주의 정책에 반대해 경찰에 끌려가 고문받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의 아버지는 어떠했나?
"내 아버지는 실제 반전운동을 하는 극단에서 일했던 분이다. 극단 전원이 경찰에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반전사상'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물려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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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가 기자들과 간담회를 나누는 모습. ⓒ 오마이뉴스 김지은

- 일본 군국주의 비판 등 작품 쓰기 전에 일본 극우집단으로부터 받을 비난도 감안했나. 실제로 작품이 발간되고 나서 그런 비난을 받진 않았나?
"물론 그런 비난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강한 의지를 갖고 썼다. 발간하기 전에 아내에게도 '혹시 이상한 편지나 전화가 올지 모른다'고 경고를 했을 정도다. 그런데 실제 발간되고 나서 격려는 많이 받았지만 이제껏 한번도 비난의 전화나 편지를 받은 적은 없다. 일본의 우익단체들도 분명히 이 만화를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군국주의 비판을 넘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고 그에 감동했으리라 생각한다."

- 일본에겐 피폭의 피해가 있었지만 그로 인해 한국은 전쟁이 종결돼 식민시대가 끝나게 됐다. 이런 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갈지 모른다.
"맞다. 한국민이 핵으로 전쟁이 종식됐고 해방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인은 원폭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전쟁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내 만화를 통해) 그런 점 또한 인식시켜주고 싶다."

- 현재 미국은 다시 평화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등을 공격해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전쟁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던 일본 정부가 전쟁에 대해 뚜렷한 반대입장을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집권당인 자유당의 몫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 피해자로서 미국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나, 없다면 앞으로 그럴 의향이 있는가?
""피해보상을 요구해본적은 없으나 앞으로 재판을 해보고 싶다. 전쟁을 이용해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핵실험을 한 미국을 용서할 수 없다. 장래에 꼭 한번이라도 핵실험을 한 미국에 대해 재판을 해볼 생각이다."

-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미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전쟁과 핵에 대해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핵전쟁 이후의 인류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을 보고 굉장히 화가 났다. 핵전쟁이 일단 일어나면 인류는 다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망한 뒤의 세계를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이 작품에는 '리얼리티'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화를 통해 밝게 그려할 것은 밝게 그리고 (핵과 전쟁의 처참한 피해상 등) 사실적으로 표현할 것은 사실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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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게이지. ⓒ 오마이뉴스 김지은

- 처음 온 한국이 어떤 느낌이었나.
"한국인이 참 친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인은 차가운데 비해 한국인은 따뜻했다."

-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과 같이 뮤지컬을 봤다고 들었다. 어땠는가?
"참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웠다. 더불어 일본정부의 무관심에도 분함을 참지 못했다."

- 앞으로의 창작활동 계획은.
"지금은 몸이 많이 지쳐있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러나 회복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몸이 좋아지는대로 언제든 작품 준비를 할 것이다. '만화'가 있기에 평생 만화와 함께할 생각이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마디.
"재미있는 만화이다. 그러나 만화로만 보지는 말아달라.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그것이다. 작품 속 '겐'의 상징적 이미지인 (밟혀도 굽히지 않는) '보리'와 같은 인간의 생명력과 반전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한국의 독자들이 느낀다면 작가로서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러나 이 역시 읽어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꼭 읽어보길 권한다."

* 통역: 강두엽 (동경경제대학원 재학), 김해경 (메지로대 재학)

"전쟁의 현실적 의미 짚어보고 싶다"
<맨발의 겐> 소재로 다큐멘터리 만드는 노나카 아키히로

▲ 노나카 아키히로씨.
기자 간담회 내내 나카자와 게이지의 모습을 디지털 캠코더에 담는 이가 있었다. <아시아 프레스(Asia Press)>의 대표이며 비디오 저널리스트(Video Journalist)이기도 한 노나카 아키히로(49)가 바로 그다.

그가 <맨발의 겐>을 처음 접한 건 30년 전 잡지 <소년 점프>를 통해서다. 그러나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 만화가 뮤지컬로 한국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부터라고.

그는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한번 핵폭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 다큐멘터리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노나카씨는 현재 작가 나카자와를 중심으로 두 가지 영상을 만들 계획이다.

그중 첫 번째는 오는 12월 2일 일본 NHK 채널을 통해 나갈 8분짜리 뉴스 리포트다. 나카자와의 방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인이 <맨발의 겐>과 핵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는다.

두 번째는 내년에 완성될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 <맨발의 겐>을 중심으로 오늘날 미국의 아프간 공습과 이어 계획하고 있는 이라크 공습까지를 아우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을 담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전쟁은 필요악이라는 생각과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평화사상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그가 내놓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관객이 그 답을 찾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김지은 기자
"'옳은 전쟁'은 없다"
지난 8월 <맨발의 겐> 한국어판 완역한 김송이씨

▲ 김송이씨.
이번 간담회에는 <맨발의 겐>의 한국어판 번역자인 김송이(56·재일작가)씨도 함께 했다. 김씨는 지난 8월 <맨발의 겐> 총 10권을 완역한 이후 이번 나카자와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김씨는 "올해는 한·일 공동 월드컵이 있었던 해인데 8월에 <맨발의 겐>도 10권까지 완역돼 나도 양국간 문화교류의 큰 흐름 속에 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전쟁은 결국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말 못하고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폐해가 있다"며 "현재 미국이 전쟁을 정당화 하고 있지만 '옳은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 작품 통해 독자들이 알게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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