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그 어려움 속으로의 짧은 여행

책 속의 노년(45) : 김혜정〈나부의 초상〉

등록 2002.12.06 13:42수정 2007.06.1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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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아래, 나무들은 마른 잎을 달고 서성거리고 있었고 산길은 텅 비어 있었다. 대통령 후보 지지 운동원들의 쇳소리나는 구호와 스피커를 찢을 듯한 노랫소리가 남한산성길을 오르는 내 뒷머리에 끝까지 따라 붙는다.

산길 초입에 서있는 전봇대, 높이 붙인 전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님을 찾습니다…74세…치매, 내복, 운동화…사례금 500만원" 사진 속 아버님의 눈은 어디를 보고 계신 지 알 수 없다. 추운 날씨에 내복 차림으로 집을 나서신 아버님, 가족들은 얼마나 애를 끓이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 고흥댁은 큰아들 석인이 제대를 앞두고 죽어 돌아오자 정신을 놓아 버린다. 그리고는 그것이 치매로 이어진다. 고흥댁은 결혼과 동시에 유학을 가버린 작은 아들 석현 곁을 떠나, 딸처럼 기른 인영에게로 온다.

병약한 엄마로 인해 이웃 고흥댁의 등에 업혀, 고흥댁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란 인영. 고흥댁은 그런 인영을 수양딸 삼고 싶었지만, 일찌감치 석인의 짝으로 점찍었기에 며느리감이라 여기며 도타운 정을 쏟아 붙는다. 남매처럼 자란 석인과 인영, 서로 사랑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갈라진다.

고흥댁과 같이 산지 3년. 인영의 생활 리듬은 완전히 깨지고, 운영하던 미용실마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만다. 흔히 "본인에게는 천국, 가족에게는 지옥" "치매에 장사 없다" "친자식도 원수가 되는 병"이라 일컫는 치매 환자 수발의 어려움을 인영은 혼자서 고스란히 겪어낸다.

내 물건을 훔쳐갔다는 도난 망상에서부터 과식, 대변까지 입에 넣는 이식(異食, 먹을 수 없는 것까지 입 속에 넣으려고 하는 것), 대소변을 참지 못하고 싸는 실금(失禁), 인물 오인, 목욕 거부, 배회, 공격적 행동…. 고흥댁의 문제 행동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고흥댁은 그 후 목사가 운영하는 사설 요양원에 맡겨졌다가 귀국한 석현에게 이끌려 석현과 같이 있게 되지만, 결국 집을 나와 헤매다가 경찰에 발견돼 인영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인영 곁에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영에게 같은 동네에 사는 교사 지훈이 나타나 편안한 상대가 되어주고 깊은 위로를 주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가 사이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인영은 고흥댁의 치매로 인한 문제 행동에 힘들어하고 때때로 도망치고 싶어하면서도, 치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차분하게 대처해 나간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다 혼자 감당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에게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치매 환자에 대한 대처와 간호 방법을 잘 알고 최선을 다해 수발하긴 하지만, 그것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며 결국 수발자의 소진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치매 발병 후 평균 생존 기간을 8년으로 보는데, 만일 고흥댁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5년 정도 더 살았다면 인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혈육을 떠나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과 소통을 통해 상처 치유의 경험을 하고, 그 때 비로소 자신과 화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치매 가족에 대한 사회적 지원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설에 대한 여전한 불신과 거부감의 문제이다. 고흥댁이 잠시 머물렀던 사설 요양원에 대해 석현이 "거지 소굴"이나 다름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가족들의 무책임에 기대어 돈만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안락하고 편안한 시설이라 해도 갑작스레 가족을 떠난 치매 환자들이 적응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만족스런 시설이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치매 환자의 상황을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치매 환자에 대한 책임과 수발을 전적으로 개인과 가족에게만 떠맡기는 사회에서, 소설마저도 어느 한 개인의 착한 마음과 정, 환자와 수발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서 풀어나간다면 언제 우리 사회에서 치매가 올바로 이해되고 그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치매에 대한 세밀한 이해가 돋보인 소설이어서 그런 아쉬움은 더 큰 것 같다. 그나저나 남한산성길을 오르며 보았던 그 전단지 속의 아버님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를 헤매고 계실까. 누군가 손을 내밀어 거두어 주기나 할까. 내가 직접 돌봐드리지는 못한다 해도 도울 길을 찾을 수는 있는 법, 혹시 지금 길 위에 맨 발로 서 계신 우리들 부모님은 안 계신지 둘러보기라도 할 일이다.

(<나부의 초상>은 김혜정 소설집 <바람의 집>에 실린 중편소설이다 / 하늘연못,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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