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역변수'가 된 한미관계

대선과 반미열풍 :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등록 2002.12.08 01:24수정 2002.12.0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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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정국에 예기치 않던 반미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예전 같이 한총련 학생이나 재야 통일운동가들의 데모가 아니다. 여중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국민이 부시대통령 사과, 소파 개정을 외치며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전세계가 '양키 고 홈'을 외쳐도 유일하게 반미무풍 지대였던 한국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얼마나 다급했던지 친미보수세력의 원조를 자임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조차 그동안의 태도에서 돌변하여 항의 미사에 참여하는가 하면 촛불시위에 동참 여부를 고민했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6월 미선이와 효순이 두 어린 여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상의 거대한 변화와 전환기도 언뜻 보기에는 우발적인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제1차 세계대전을 터뜨린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이 그런 것이다.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미군으로 구성된 미군사법원의 배심원단이 관제병과 운전병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긴가민가하던 일반국민들조차 분노의 행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태는 두 여학생의 추모분위기에서 더 나아가 주한미군의 위상과 그리고 본질적으로 한미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대선이 투표일을 향해가면서 바야흐로 반미경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반미경쟁이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1948년 정부수립이래 역대 선거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야당 후보는 미국의 유력자하고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온갖 수모를 견디며 미국에 구애했다. 또 집권당 후보는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미국고위층을 만나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정통성이 부족한 군사정권이 미국으로부터 공인 받는 것을 정통성 확립의 계기로 삼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민주화 투사였던 YS와 DJ도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현재의 시위나 항의를 반미로 규정할 수는 없다. '반미'라고 하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배제를 요구하는 것인데, 현재 국민 정서는 인권수호차원의 문제제기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문제해결절차를 세워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반미일 수는 없다. 굳이 따진다면 “시시비비를 가리자”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이나 학자들이 쉽게 반미시위라고 이름 붙인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동안 한국에서 미군 혹은 미국은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시비를 가리는 것조차 반미로 일단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번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일체의 시시비비는 해서는 안되는 ‘대역무도’한 일로 낙인찍혀 왔다.

그러나 이제 ‘미국에 NO라고 말하는 한국’시대가 열리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은 한국에 구원자가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친구사이로 가고 있다. 친구가 잘못할 때 우리는 친구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때로는 따끔한 질책도 하고 충고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한미관계는 일방적 관계에 머물러 왔다.


미국은 영원한 후원자고 한국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처럼.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냉전시대의 한미관계는 탈냉전시대의 대등하고 상호호혜적인 관계로의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한미 양국의 국민이나 정치지도자는 새로운 경향을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에 YES만 하는 한국’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선후보들이 앞다투어 소파개정을 약속하고 부시대통령의 직접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한미군사동맹을 강조하고 부시대통령의 대북강경책을 절대적으로 옹호해온 한나라당이 최근의 반미시위에 적극 동조하는 태도변화를 보이는 것은 대국적 견지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원래 외교와 안보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국가이익에 바탕한 초당적 운영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5년간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은 대북문제와 안보문제를 정치 투쟁의 핵심고리로 삼아왔다. 국가이익과 민족적 이익이 지역주의와 결부된 정쟁의 대상이 됨으로써 국론분열과 더불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이제라도 한나라당이 초당적 외교안보운영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한가지 의구심은 남는다. 이회창 후보의 변신이 표를 의식한 제스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변신이 표를 의식한 행보지 철학과 정책의 근본적 변화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이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전반적으로 보아 친미보수정당이라는 평판을 받아온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사실 이번 대선이 국제관측통에게 갖는 의미는 20년만에 보수3각동맹이 재현될 것인지 하는 점이었다. 80년대초 미국의 레이건, 일본의 나카소네, 한국의 전두환은 보수우익의 3각동맹시대를 열어 동아시아를 신보수주의의 우산 속에 담았었다. 만약 이번에도 미국의 부시, 일본의 고이즈미, 한국의 이회창으로 이루어진 보수 3각동맹이 등장한다면, 김대중시대와는 전혀 다른 동아시아가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동안 한미양국의 보수세력이 긴밀한 공조를 맺고 있다는 조짐이 꽤 있었다. 11월 26일 이회창후보가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부시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자 몇시간 뒤 부시대통령의 사과가 대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또 12월 7일 미하원의원단 일행이 방한계획을 취소하였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탈북자 가족 면담 등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일정을 잡고 있었다. 투표일을 2주일 앞두고 한국에서 민감한 정치적 일정을 수행하겠다니. 원래 이 시기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지역구 활동에 전념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여중생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북문제, 한미관계를 둘러싸고 주요 후보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일어날 때다. 그런데 돌연한 반미돌풍으로 이 이슈들은 사라지고 대신 반미경쟁이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것은 노무현 후보에게 매우 유리한 정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노 후보는 자신의 취약분야로 지적되는 외교분야를 카버하기위해 꽤 수고를 했어야 했을 텐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도 나쁘지 않는 이슈다. 레드컴플렉스라는 복병을 건너뛰고 자신의 진보성을 거부감없이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슈이니까.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각 후보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자신이 다가가려는 층의 사람들에게는 거부를 당하고, 한편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의 울분에서 보듯 극우세력의 반발 또한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보수세력을 설득하면서, 새로운 진보내지 중도적 지지기반을 확충하고 싶다는 것이 이 후보의 속내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는 것은 보수세력의 분열과 지지기반의 축소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것같다.

노무현 후보에게도 마찬가지 딜레마가 있다. 그동안 대등한 한미관계를 주장하면서 상대적으로 강성으로 비쳐진 노 후보로서는 기존의 지지층을 실망시키지 않으면서도 안정감도 주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요구에 직면해 있다. 바로 이 점이 보수적인 이 후보보다도 더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일 것이다.

미국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움직일 수 있는 표는 얼마나 될까? 정확하게 계량하기는 어렵지만, 국민의 80%이상이 소파는 개정되어야 한다는 어느 조사결과를 보면 선거분위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냉전시대의 색깔론, 매카시즘이 활개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대선은 큰 진보를 한 셈이다. 적어도 이번 대선에 한해서 미국은 더 이상 변수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역변수’다. 미국이 호감을 보이는 후보가 예전에는 표를 더많이 받았지만, 이번에는 감점요인이 된 것이니까.

후보들이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미관계를 포함한 우리 외교의 틀을 선거전략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이익, 민족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접근해주기 바란다. 국민들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관철하면서 한미관계가 상호호혜적 관계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외교적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한미관계는 의식의 변화, 사람의 변화, 제도와 틀의 변화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제 의식의 변화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는 의식에 맞추어 사람을 바꾸어야 할 때다. 지금도 냉전시대처럼 때려잡고 무찌르자는 식의 대결의식에 사로잡힌 논객들이 한미관계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남북화해와 동북아 시대를 열 수 있는 민족자주의식을 갖춘 국제화시대의 전문가로 물갈이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세대교체가 주요 이슈인 것처럼 외교분야에서도 세대교체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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