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빵의 역사>, 빵과 밀로 보는 세계사

등록 2002.12.22 11:17수정 2002.12.2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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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우물이있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이 빵만으론 살 수 없음을, 빵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야콥은 그런 생각이 현실을 모르는 감상일 뿐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빵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오만함을 느끼게 합니다. 책을 쓴 야콥을 만나보진 않았지만(이미 죽었죠) 저자의 본성이 오만한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6천년의 역사를 집약시키겠다는 그 원대한 '포부'와 그 포부를 실현시키기 위해 저자가 검토했다는 4천권이라는 방대한 '독서열'에 대한 부러움이 그런 거북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글쎄, 이 책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생물, 자연, 종교, 욕망 등 인간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내용들이 '빵'이라는 하나의 주제 속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 책의 숨겨진 주제는 '밀은 어떻게 세계를 장악했는가', '밀로 만든 부드러운 흰빵이 다른 빵을 밀어내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쌀에 대한 설명이 후반부에 나오긴 하지만 부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죠. 야콥은 이집트에서 시작한 밀이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장악하는 기나긴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Heinrich Eduard Jacob, 1889~1967)은 베를린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문학, 철학, 음악, 역사를 공부했으며,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의 주요 일간지 수석기자로 활동했다.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집단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아내와 미국인 삼촌 덕분에 미국시민권을 얻어 1939년 석방되었다.
뉴욕에서 생활하다 오스트리아로 옮겨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 분야의 지식을 두루 갖춘 20세기 대표적인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손꼽히며, 평전, 시, 소설, 역사, 희곡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썼다. 저서로 <요한 스트라우스(Hohann Strauss)>, <멘델스존과 그의 시대(Felix Mendelssohn and his times)>, <모차르트(Mozart)>, <커피(Coffee)> 등 40여권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빵의 역사(Six thousand years of bread)>는 저자가 필생의 역작으로 꼽는 저서이다. 이 책은 최근 그 진가를 인정받아 세계 각국에 번역 소개되고 있다.

옮긴이 곽명단은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옮긴 책으로 <세상의 어린이들>, <일 잘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 <나는 내가 아니다-프란츠 파농 평전> 등이 있다.
옮긴이 임지원은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논문으로 <녹두전분의 이화학적 특성 연구> 등이 있으며 생명과학과 의학 분야의 논문을 다수 번역하였다.


야콥의 설명을 듣다보면, 빵은 믿음이자 통치술이요, 철학이자 기술입니다. 그의 생각은 책의 마지막 단락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과 빵은 나란히 6천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걸어왔다. 신의 두 피조물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순간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배불렀다'고 성경은 말했다. 이보다 더 간결하게 행복과 만족과 감사를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607쪽). 사람에겐 뭐니뭐니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 말보다 더 강하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빵을 처음으로 만든 곳은 이집트라고 합니다. 왜 이집트냐구요? 그건 이집트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청결과 순수를 중시한 다른 민족들이 음식의 부패를 막기에 급급했을 때, 이집트인들은 "그들은 모든 생명체의 끊임없는 변화와 변형을 숭배했으니, 시큼하게 변질된 반죽을 보면서 감탄했을 것"(93쪽)이라 합니다. 즉 빵이라는 인류 최고의 선물은 청결과 순수가 아니라 부패와 변질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이지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습니까?


빵은 최초의 '의도적인' 화학반응이자 최초로 '제조된' 제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빵의 제조를 따라서 사회조직도 '제조'됩니다. "빵을 발명한 이집트인은 빵을 중심으로 모든 행정조직을 편성했다. 유대인들은 빵을 종교법과 사회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엘레우시스 빵 신전(데메테르를 모신 신전)에 대한 심오하고 장엄한 설화를 창조하였다. 로마인들은 빵을 정치적 구성요소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빵으로써 통치했고, 빵으로써 세계를 정복했으며, 빵으로써 멸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온 날, 빵은 이런 말로써 최고의 영적 의미를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먹어라! 내가 곧 빵이니라'"(60쪽).

야콥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행동이 '먹는 것'이라는 전제를 통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빵과 관련된 사회사를 추적합니다. 방대한 6000천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통찰력은 아마도 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경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제빵사 길드'의 강한 정치성, 빵의 배급과 관련된 황제의 권력, 예수와 빵의 관계(너무나 독창적인 해석입니다), 성채의식을 둘러싼 기독교 내의 대립과 학살, 중세 사람들이 방앗간 주인과 제빵사를 싫어했던 이유, 유대인이 탄압받았던 이유,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1, 2차 세계대전과 빵의 연관성 등을 얘기합니다.

그의 이야기 보따리는 줄어들 줄을 모릅니다. 세상의 희극과 비극은 빵에서 시작해 빵으로 끝납니다. 각종 전염병과 기아로 무너져가던 유럽을 구원한 것은 복음이나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감자와 옥수수입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세상이 유목민과 정착민의 대립, 도시인과 농민의 대립으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업적은 "로마법이나 경찰제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유목민을 농민으로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159쪽)"고 단언합니다. 결국 빵이 로마제국을 건설했고 빵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킵니다. 이런 설명방식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내전(남북전쟁), 제1,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을 빵에서 찾습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빵을 통해 드러나는 '땅의 소중함'과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빵에 대한 요구는 그 씨앗을 보듬을 땅에 대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혁명의 구호인 "빵을 달라"는 토지에 대한 요구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토지에 대한 요구는 농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콥은 모세나 솔론,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을 얘기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빵과 땅, 농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농민은 잊혀지는, 아니 사라져야할 존재입니다. 귀족들에게 착취당하던 농민들은 근대라는 '신세계'에서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높이 솟은 스카이라인과 금속성을 내는 거대한 기계 앞에서 농민은 작은 존재일 뿐입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땅과 농민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그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해,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떠나거나 부당한 차별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글보다는 자연과 친숙해야 했던 그들이기에 항상 '바보' 취급을 받았지요. 농민들은 어깨를 떨구고 농촌을 떠났습니다. "땅에서 추방되어 사라진 농민들은, 영원히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지 않게"(590쪽)됩니다. 아무도 농민을 돕자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정작 "농업발달에 투자하는 비용은 군사비용에 미치지 못하"(592쪽)는데도 말이죠.

근대문명은 마치 자신이 이전 단계를 소멸시키고 세계를 구한 영웅처럼 우뚝 군림하고 있지요. 하지만 "기계시대는 인간의 경제 및 사회, 역사의 한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가 이전 단계를 소멸시켜버린 것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명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동시에 여러 시대를 살고 있으며 모든 시대의 경험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572쪽).

야콥의 당부는 이런 것입니다. "국가의 역사는 크게 농업의 역사이며, 사람은 진정 '식량의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360쪽). 그리고 이렇게 식량을 자급자족하려면 땅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바위는 뼈이고, 식물은 털이며, 물은 피이다. 이것은 시적인 과장이 아니며 가장 순수한 현실이다. 땅은 정말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피조물이다. 땅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땅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은 지하에서, 지상에서, 토양의 물과 기후에 의해서, 땅 자체나 공기에 의해 결합된다"(557쪽). 농민과 땅의 중요성을 망각한 사람은 빵의 의미 또한 잊어버리게 됩니다.

한국의 농민들도 계속 농촌을 '등지고'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의 도시화율(동 지역)은 79.7%입니다. 불과 2년이 지났지만 지금은 더 많은 농민이 땅을 버렸을 겁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할퀴고 지나간 채 자리에, 다시 자유무역협정(FTA)이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산업생산력을 발전시켜 더 값싼 쌀을 더 많이 수입해서 먹으면 되지 않냐고.' 야콥의 설명에 따르면, 나폴레옹도 그렇게 믿었지만 결국 빵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나폴레옹처럼 무모한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농민들 앞에서 "개방은 최대한 저지하겠다, 농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폴레옹과 같은 카리스마만이 아니라 슬기로운 지혜, 무엇보다도 '먹거리'를 단순히 '상품'으로 바라보지 않는 '생명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고 그 두께와 무거움만큼 많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얘기를 담다 보면 하나의 사건과 관련된 설명들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죠. 앞서 말했듯이 야콥은 빵의 중요성을 정치적인 사건들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난관의 극복과 전쟁의 승리는 모두 빵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죠. 저는 그런 설명이 지나친 단순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빵의 역사>만이 아니라 <무엇무엇의 역사>와 같은 종류의 책들이 똑같이 가지는 위험이지요. 물론 독자들이 그것을 현명하게 걸러서 읽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야콥은 후반부에서 미국을 중심에 놓고 얘기를 합니다(나찌로부터 그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일까요?). 내전(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전세계를 지배하는 '빵의 나라'가 됩니다. 야콥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먹여살린(?) 미국의 인도주의적 정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야콥은 "밀의 제국인 미국이 로마제국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선물은 라틴 문명의 모국을 구해냈다"(507쪽)고 얘기합니다. 쌀의 나라 미국(米國), 빵을 지배하기에 그들은 그렇게 오만한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야콥은 미국역사에서 은폐된 20세기 초반 농장노동자들의 절규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는 스타인벡을 인용하지만 그 문제의 싹을 덮어둡니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저자는 식민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미국이 빵의 제국이 됨으로써 다른 국가들은 자생적인 농업생산력을 잃어버렸다는 그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지요. 사실 빵의 제국 뒤에 감춰진 것은 빵을 통한 지배, 멀어져가는 자급자족의 이상입니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한계는 '나열된 방대한 역사 이면에 감춰진 지배의 역사'일지 모릅니다.

참, 아쉬운 점이 또 있군요. 번역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곳곳에 오타도 보입니다. 출판사가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빵의 역사 - 빵을 통해 본 6천년의 인류문명, 개정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
우물이있는집, 2005

이 책의 다른 기사

"빵은 곧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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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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