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카메라를 내리고, 하루 걷기에 동참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성유보 선생님과 환담중인 김 감독.전희식
AVI 화일을 윈도우미디어를 이용해 압축율이 높은 WMV 화일로의 변환작업을 끝내고 바로 ‘길동무’서버에 올렸다. 온라인상에서의 시연을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아주 성공적이었다. 화질과 음성이 깨끗했다. 나는 새창열기 카피를 망설임도 없이 “김태일 감독님 감사 합니다”로 뽑았다. 함평모임에서 만났을 때 눈이 퉁퉁 부은 김 감독이 공중파 방송에 1시간쯤 길이로 편집해서 방영하는 문제를 교섭 해 봤는데 성사되지 않았다고 덤덤하게 전해 줄 때 내가 더 안타깝고 초조했던 기억이 난다.
구닥다리 컴퓨터가 용량이 작아 영상편집 프로그램 프리미어를 돌리기도 숨이 헐떡거리더라는 김치환 길동무 총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첫 아이 100일을 맞은 김 감독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그냥 걷기도 힘들 1840킬로미터의 거리를 카메라에 눈을 박고 좋은 화면을 잡아내기 위해 100일을 하루같이 걸으신 김 감독의 앞날이 영광 있기를 빈다.
| | "생활속의 민족과 문화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 | | 100일 동안 걸으면서 촬영한 김태일 감독의 뒷 얘기 | | | | -그 먼 길을 촬영 하시면서 걸어가느라 이중으로 수고 하셨습니다. "제게는 수고라고 할 게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도 큰 복이었습니다. 쌀이나 농업문제에 관심이나 애정이 없던 제가 100일을 걸으면서 느끼고 배운 것은 한마디로 충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큐를 하다보니 우연히 만나게 된 우리쌀지키기 운동을 통해 우리 농업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었고 새삼 다른 각도에서 민족이라는 문제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100일 걷기에 동행하게 된 건가요? "네. 이주희 학생 알죠? 새 샘터 친구요. 그 친구가 실상사 장기귀농학교 8기 졸업을 하는 날 박병구 선생님 아시죠? 그 분이랑 실상사에 주희 찍으러 같이 갔었습니다. 그때 가서 우리쌀지키기 100일 걷기운동이 시작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도 주희가 100일을 다 한번 걸어 보겠다고 하길래 나도 이 땅에 태어나서 밟아보지 못한 땅이 너무도 많아서 전국을 한번 걸어보자 하는 호기심이 첫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하.... 전기자님은 제가 무슨 거창한 의무감이나 비장한 결단이 있었던 줄 알았나보네요?"
영상에 다 담지 못한 걷는 동안의 감동은 어떤 게 더 있습니까? "아 네. 청소년들요. 아이들 말입니다. 평화나 수연이 한내. 새한이 얘들 초등학생 또래들 또 새 샘터 청소년들. 이들이 하루하루 깨우쳐 가는 땅에 대한 마음들. 쌀에 대한 마음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벅찼습니다. 또 이들과 함께 100일을 잘 어울리면서 조화를 이루어 내는 그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지키는 버팀목 같았습니다. 그 전에는 다큐를 찍으면서 주로 정치지향적인 것들을 찍으면서 국가나 체제나 민족 등등 거대한 주제만 다루면서 지내왔는데 100일 걷기를 하면서 아.....내가 이런 것들을 정말 놓치고 살아 왔구나 하면서 무릅을 탁 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제가 뭘 해 줬다기보다 얻은 게 더 많은 걷기였습니다."
-걷기가 끝나기 직전에 아이가 태어났죠? "네. 뒤늦게 장가를 가서 첫 아이가 걷기 끝나 갈 무렵에 태어났습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우리 대열이 지나는데요. 아이가 곧 태어난다고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고 아이 이름을 지어라고 하데요. 그래서요. 그곳이 송이가 아주 많이 나는 고장이라 이름도 김송이라고 지었습니다."
-그토록 쏟았던 공력과 엄청난 테이프들이 잘 활용되지 못하면 어쩌나 제가 초조해요. "KBS 하고 MBC 에 접촉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다 그러더라구요. 너무 내용이 무겁다. 방송용으로는 너무 부적합하다. 내용이 좀 가벼워야 다루기 좋다. 뭐 이런 반응이었어요. 참 놀랐습니다. 우리쌀을 배고플 때 배 채우는 음식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바라보는 거 아니겠어요? 쌀은 바로 우리 민족의 5,000년이 담긴 문화인데 이런 식이면 이런 사회분위기면 참 걱정이 됩니다. 제 작품이 상영되고 안되고를 떠나서요."
-100일 걷기가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김감독님만 작업실로 가서 밤샘이 시작되었겠네요? "하하....네. 대신 저는 복습과정을 통해서 테이프를 앞으로 뒤로 왕복시키면서 걷기를 몇 백일을 더 한 것 같네요. 소중하지만 잊혀지고 버려지는 현실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농업이 그런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말입니다. 100일 걷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쭉 농업문제와 쌀문제를 찍어 보고 싶습니다."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괜히 전기자님 수고 끼쳐 드린 것 같네요. 별것도 아닌데 인터뷰까지 원. 애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다큐요? 얼마든지 상영하고 틀어도 됩니다. 널리 널리 우리 농촌이 알려지고 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 전희식 | | | | |
덧붙이는 글 | 나는 걷기운동이 시작되면서 거의 동시에 100일 걷기 사이버단장을 맡아 사이트를 개발하고 사이버 모금단을 조직하였다. 다섯 차례에 걸쳐 연 13일 가량을 어떨 때는 혼자, 어떨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걷기행렬에 동참했다. 나는 사이버를 통해 우리쌀지키기운동이 100인 100일 걷기가 아니라 10,000인이 10,000원씩 모금하는 대대적인 국민운동으로 확대되기를 염원했다.
사이버 모금단의 역할은 단순히 모금에만 머물지 않고 자기 고장을 걷기 행렬이 지날 때 합류하는 지역운동을 전개하고 중간 기착지에서 개최되는 중.대규모 행사에 참석하기. 사이버 공간에 우리쌀지키기의 게시물을 퍼 나르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명망 높으신 주요 어른들을 사이버 후원회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여 모금운동에 열기를 더해 나가면서 걷기가 끝난 후에도 직접 걸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이버걷기에 접속한 모든 국민이 이후의 우리쌀지키기 운동의 기간요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졌었다.
사이버걷기 사이트에서는 100일 동안 연인원 28,000명이 참여했고 730만원이라는 액수가 모금 되었다. 계획했던 것이 착수조차 되지 못했던 일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생각조차 못했던 의외의 소득과 감동도 많았다. 이 영상물로 남겨진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이 김 감독님의 말처럼 계속되길 빈다.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경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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