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나쁜 아이죠?"

응달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아이

등록 2003.01.01 20:17수정 2003.01.0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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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네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런 기억이 없는데도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네 생각을 했단다. 며칠 전에 너에게서 온 편지 말이야. 그 편지 답장을 해주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짧은 답장은 해주었구나. 언제든지 편지를 받기가 무섭게 답장을 써 주곤 했는데 너무 늦어지면 혹시라도 네가 무슨 딴 생각을 할 지 몰라 몇 줄 써서 보내긴 했는데…

밖이 아직 어둑해서 거실에 나가 시계를 보니 6시 23분이더구나. 어제 늦게까지 책을 읽다 가 잠자리에 들어서 좀더 잠을 청해볼까 하다가, 갑자기 잃었던 기억을 되찾기라도 한 사람처럼 나는 서둘러서 옷을 입기 시작했단다.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니? 갑자기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사진기에 담아 오고 싶었던 거야. 너에게 주려고, 너에게.

너의 슬픈 편지! 그 편지를 받고 난 한참을 망연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단다.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마술 보따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마술 보따리를 찾느라 밤새 뒤척였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사진기에 담아 너에게 주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사진 기술이라고는 셔터를 누르는 것밖에는 모르는 초보자에게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 찾아와 줄까?

선생님...
어제 학교 끝날 때쯤..보람이 정말 많이 울었어요...
아빠가 학교에 저를 보러 오셨더라구요..
2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아빤데...
그래서였는지 보자마자 아빠를 안았어요...

아빠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속으로 계속 그 말을 되새겼어요...
아빠, 옷도 되게 춥게 입으셨더라구요..
맘이 아팠어요...
같이 점심을 먹자는 말에..저는 거절했어요..

그냥 아빠 얼굴 마주 대하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얼굴이 많이 부으셨어요.
살이 찌신 건지.. 아님..어젯밤 술을 또 많이 드시고 그렇게 부우신 건지....
속이 많이 상했어요.

아빠랑 이제 같이 살자라는 말에 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어요..
저는 이쪽도 저쪽도 이젠 다 싫어요..
그냥요..
어차피 또다시 그 생활에 적응하다보면 저도 또 힘들어 질테니까요...
처음은 아니라고 다시 시작하는 처음은 아니라고 새롭다고..그렇겠지만...

세상은 저를 한 두 번 속인 것이 아니니까요....
마지막 아빠를 돌아서면서 두 번 꼭~ 안아주고...
계단을 올라갔어요..


근데 참았던 눈물이 흐르더군요....
교실까지 가서도 눈물이 났고, 집에 가는 길에도 눈물이 나더라구요...
선생님, 어제 선생님을 봤다면 아마 더 울었을꺼예요...
선생님, 저 너무 나쁜 아이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해요...
눈물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도...저는 세상을 믿기 싫고, 어른을 믿기 싫고...



보람아,
새벽 하늘의 푸르스름한 빛을 너는 좋아하니? 길을 만들기 위해 잘린 산자락에 몇 그루 볼품없는 나무들이 서 있고, 나무 가지 사이로 외로운 별 하나 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렴. 그 한산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을 사진기에 담을 수 있을까? 좋아, 찍어보자. 아차, 실패! 그래도 난 저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빛이 좋다.

2003년 1월 1일 06시 32분
2003년 1월 1일 06시 32분안준철
그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아름다움을 담아오기에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의 기능이 너무 단순한지도 모르지. 밝은 자연의 빛에서만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는 평범한 구조로는 아직 볕이 없는 어둔 새벽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하지.

그런데 넌 혹시 저 별의 아름다움을 담아 낼 수 있는 깊고 풍부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르지. 넌 볕에서만 자라지는 않았으니까. 응달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너의 슬픔이 널 그렇게 깊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르지. 너의 글을 보면. 너의 눈빛을 보면.

날이 몹시 춥더구나. 겨울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대는 소리가 들렸어. 우리가 편히 잠들어 있는 동안 겨울나무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아슬한 가지 끝으로 물을 나르고 있었어.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나무의 살아있음을 보고 아는 거지. 봄이 오면 가지 끝마다 새순을 다는 것을 보면 아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래 전에 쓴 <겨울나무>라는 시가 떠올랐단다.

저 뿌리의 고단한 노동이 얼마나 깊어져야
나무 끝까지 물 한 방울 전할 수 있을까?
저 가지 끝에서의 기다림이 또 얼마나 깊어져야
파아란 생명 하나 매달 수 있을까?


감나무의 겨울나기
감나무의 겨울나기안준철
보람아, 너의 고단한 슬픔의 노동도 이제 곧 결실의 때가 오고 있지 않을까? 세상을 믿기 싫고 어른들을 믿기 싫어도 네가 아버지를 두 번씩이나 껴안아 드린 것을 보면. 같이 점심을 먹자는 말에는 거절했지만, 옷을 춥게 입으신 아빠를 보고 네 맘이 아팠던 것을 보면. 머지 않아 저 외로운 가지 끝에도 너의 붉은 사랑의 열매가 매달려 있겠지.

겨울나무에 너무 마음을 빼앗겼을까? 산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해가 떠오르고 말았구나. 하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괜찮았단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조금씩 커지면서, 드디어 해가 붉고 둥근 해가 떠오르더라. 차가 없어서 더 멋진 곳으로 가지 못했지만, 기술이 없어서 아름다운 해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는 못했지만, 오직 너만을 생각하며 찍은 새해 첫날의 해야. 만나보렴. 그리고 해처럼 씩씩해지렴.

봉화산에서 본 일출
봉화산에서 본 일출안준철
새해 첫날 이런 결심을 했단다. 우선 이번 겨울 방학 동안에는 하루 한 권 책을 읽기로 말이야. 한번 해보려고 해. 마음이 산란할 때는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책을 읽다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들을 만나게 되지. 세상은 이미 아름다운데 나의 눈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지. 행복도 그런 것 같애.

누군가의 행복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행복하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순천만에 와서 다시금 느꼈단다. 호주나 시베리아에서 수 만 킬로를 날아온 고단한 철새들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갈대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그들의 아름다움이기도 하지. 시련의 바람이 없다면 갈대의 아름다움도 없는 거지.

순천만
순천만안준철
오늘 끝내 새는 찍지 못했단다. 새는 망원렌즈가 없으면 곤란하거든. 먼 하늘에 떠 있는 새들을 내 쪽으로 당겨와야 하니까. 사랑의 힘으로 말이야. 이제 네 사랑의 힘을 발휘해 보렴. 두려워하지 말고. 너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야. 너를 찾고 계시는데 손 내밀어드려야지.

넌 내게 물었지. "선생님, 저 나쁜 아이죠?" 대답하마. 넌 좋은 아이야. 그런데 너의 그 착한 성품이 어디서 왔지? 아빤 분명 널 실망시키지 않으실 거야. 아니, 이제는 그럴 수 있도록 네가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니? 선생님도 널 도와줄게.

새벽같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10시 5분전이구나. 배도 많이 고프고 사진도 실패작들뿐이어서 조금은 실망이지만 새해 첫날 너를 위해 바친 시간들이 나는 행복하기만 하단다. 너의 건투를 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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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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