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늘 합장의 아름다움을 ②

등록 2003.01.04 13:51수정 2003.01.0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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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화산을 올라 태을암의 대웅전 앞뜰을 지날 때마다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부처님께 예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족과 함께 종종 오르는 인근 도비산의 부석사 대웅전 앞에서도, 가야산의 개심사와 일락사 대웅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사찰의 대웅전 앞을 지나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을 남들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나는 인정한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또한 세상의 다양성, 또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승복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행위를 남들이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보기는 하더라도, 그런 행위에 대해 지옥에 갈 짓이라고 극단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판단에 대해서는 승복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그런 행위에 대해 한 번도 '과공(過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울러 부처님께 예를 드리면서 내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께 죄스러운 느낌을 가진 적도 없다.

내가 절에 갔을 때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것은 내 종교에 대한 강한 자부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행위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그러면서도 나는 천주교 신자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나의 그런 행위는 결코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일 수 없다.

물론 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관련하여 "나는 질투의 신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잊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몰렉 등 다른 신을 섬길 때 야훼 하느님께서 크게 진노하신 것도 잘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느님처럼, 하느님 이상으로 믿고 섬기는 것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물신(物神)이다. 물신주의와 배금주의로부터 인간의 향락주의와 온갖 그릇된 가치관이며 악행들이 나타난다. 세상의 헛된 욕망들, 속물적이고 우상적인 것들에 대한 숭배도 하느님을 능멸하고 배척하는 것이기는 마찬가지다.

바알과 몰렉 등이 신비적 실체가 있는 신이었던가. 영의 세계를 거느리는 신이었던가. 그것은 인간들의 현세적 욕망이 빚어낸 물신의 이름일 뿐이었고, 단지 우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심지어는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안에서도 강고한 힘을 펼치고 있다.


물신 풍조와 항략주의가 판을 치고, 거짓과 불의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의 문명 세계 안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느님처럼, 하느님 이상으로 섬기는 것도 실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물질을 추구하고 부(富)를 쌓아가는 현실도 그리스도교 일각의 풍경이다.

내가 절에 갔을 때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 외의 다른 신에게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바알이나 몰렉에게 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바알이고 몰렉인, 헛된 현세적 욕망이나 물신주의 따위와 관련하는 행위인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나의 그런 행위는 불도들이 지닌 착한 '불심(佛心)'을 잘 이해하고 긍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의 불심을 그리스도교의 성령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스도교의 성령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성령의 많은 표징과 설명 중에서도, 내가 가장 간단 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착한 마음'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고 하느님의 마음이기에, 그것은 곧 사람들의 착한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불심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불도들의 가슴에 착한 마음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성령이나 불교의 불심이나 그 핵심적 본질은 바로 '착한 마음'이니, 그 두 가지는 서로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마음인 불심, 즉 착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최고 가치이며 모든 교리의 기본이었기에 불교는 세계종교로 발전해 올 수 있었고,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선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불교는 핵심적 가치인 그 불심으로 하여 이 세상의 수많은 중생들을 계도하면서, 그리고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에게로 퍼져 나가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나 부분적으로는 일탈과 타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초월과 해탈의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어쩌면 불가항력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성격일 뿐이다. 일탈과 타락에 대한 자각과 성찰로 인해, 그것은 큰 쇄신과 갱신의 계기가 되고 더 큰 발전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이나 불심의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결국 성령과 불심을 지켜 내고자 하는 성령과 불심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고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인 무려 1400년 전부터 불교가 이 땅에 전파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며 역사 발전을 도와 온 것을 생각하면 불교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기도 한다. 불교의 융성은 인간 사회에 불심(착한 마음)의 파급을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불교를 배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 숭불 정책의 폐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불교의 융성이 불심의 파급을 촉진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과히 틀린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가 오랜 세월 세상의 중생을 계도하고 불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착함 쪽으로 유도하고 가꾸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내 조상들의 삶과 관련하여 나는 진심으로 불교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다. 세상의 윈리,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분의 설법은 참으로 심오하다. 그분의 깊은 깨달음으로부터 불교가 창시되었고, 그분의 마음(불심)의 전파로 세상 곳곳이 정화되고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다.

부처님을 존경하고 불교에 감사하는 마음은 실로 내 가슴에 늘 충만되어 있다. 그런 마음이 나로 하여금 사찰의 대웅전 앞을 지날 때 부처님께 예를 드리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마음, 부처님께도 감사하게 하는 이 마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내가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다면, 이 마음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런 마음 역시 하느님의 영, 성령의 작용으로부터 갖게 되는 착한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오랜 세월 중생을 계도하며 인간 세상에 불심을 파급시켜 온 불교는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고, 어떻게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에게 전파되며 발전할 수 있었을까? 불교 신앙의 핵심 가치가 불심, 즉 착하고 자비로운 마음이라면, 그리고 그 불심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유지 발전되어 올 수 있었다면, 그 불심의 근원과 정체는 무엇일까? 그 불심 또한 하늘에서 온 하늘의 마음이 아닐까? 그렇기에 하늘의 끊임없는 도우심에 힘입어 그 불심이 신비롭게 유지되는 것 아닐까?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필 수는 없을까?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서로 다른 점 못지 않게 비슷한 점도 많고 '근본 사상은 같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기에서 초월자의 진정한 모습과 뜻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불교의 경전 기록들이 전해주는 예수의 '사랑'과 석가모니의 '자비'는 동일시할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교에서 모든 존재는 신의 창조이고 인간 역시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인연 소생(所生)이라고 하는 그 '연기설(緣起說)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부활과 영생과 최후의 심판, 불교의 윤회와 열반과 업보 사상은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 역시 그리스도교의 성령과 불교의 불성(불심)과 마찬가지로 서로 비슷한 것이고, 어딘가에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언뜻 보면 이질적인 종교 같지만 사실은 용어상의 표현을 넘어서서 '사랑'과 '자비'에 기초하는 근본 사상은 같고, 서로 일치할 수 있는 진리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기에서도 초월자의 뜻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읽을 수 있는, 내가 생각하는 신의 뜻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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