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노숙자들에게 달려가십시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3.01.05 21:47수정 2003.01.0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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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도 벌써 3일째 눈이 옵니다. 바람은 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여객선도 묶여 있습니다. 큰 길 건너 들판에는 염소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서 있습니다. 눈밭이라 앉지도 못하고 밤새 추위에 떨며 저렇게 서 있었는가 봅니다. 간밤 눈바람에 얼어죽지 않은 것이 천행입니다. 아마 주인도 추위가 두려워 집 밖으로 나올 엄두를 못냈던 것이겠지요.

누구네 염소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들판으로 가 염소를 한동안 품에 안아줍니다. 염소는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체온이 느껴졌던 것일까요. 염소가 바르르 몸을 떱니다. 염소를 양지 바른 담 장 가에다 묶어주고, 주변의 풀들을 뜯어다줍니다.


도로에도 더러 빙판이 생기고, 세연지 연못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세연지 물이 언 것은 내가 고향에 돌아온 지 6년만에 처음입니다. 이 남쪽 섬에서 이토록 여러 날 눈이 오고 추위가 계속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릇푸릇 생기 넘치던 텃밭의 상치와 시금치는
몸이 바짝 얼어 있습니다. 무와 치커리도 얼음을 잔뜩 먹고 숨죽여 있습니다. 좀 자는가 싶더니 눈보라가 거세집니다. 무방비로 서 있는 눈밭의 배추와 마늘들도 얼어죽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이 남쪽도 이렇게 추운데 북쪽 지방은 어떤지요. 긴 겨울 밤, 지하철입구에 쪼그려 앉아 졸다 비명에 간 사람은 없는지요. 나는 새벽에 잠이 깬 뒤 노숙자들 걱정에 다시 잠들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겨울 여행길이었습니다. 늦은 밤 어느 도시 기차역에 내려 지하도를 건너는데 거기 계단 입구에 노인 한 분이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그 날도 습관적으로 못 본 척 지나쳐 버렸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길거리의 걸인들이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앵벌이 아이들에게 동전 한푼 적선하지 않았습니다. 동전 몇 잎이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개선시키지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 더러는 그들이 구걸해오는 돈을 갈취하는 악인들이 있다는 소문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돈을 아껴 더 확실한 선행을 하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했던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그 돈으로 술을 마시거나 딱히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사는 데 탕진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에 골몰하며 행려 노인을 지나쳤던 나는 다시 노인에게
되돌아갔습니다. 나는 노인의 손을 잡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드렸습니다.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던 노인은 손에 놓인 지폐를 확인하고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나는 노인의 인사를 받는 것이 죄스럽고, 눈물겨워 서둘러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때 나는 아주 작은 적선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의
생각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날 노인이 그 돈으로 만화방이라도 가서 겨울 밤 추위를 면했는지 아니면 다시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밤을 새웠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나는 길거리의 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작부터 해오고 있는 자선의 대열에 늦게 합류한 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다만 사회구조를 핑계로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물론 잘못된 사회 구조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신은 인내심이 적습니다. 죽음의 신은 사회구조가 바뀌기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날마다 사람들을 데려가고 말 것입니다.

어느새 또 하루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습니다. 잠시 멈추었던 눈보라가 다시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지난 연말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광화문 일대를 밝히던 수만개의 촛불들은 이 밤 또 어느 곳에서 불을 밝히고 있을까요.

그 촛불들이 이 엄동설한, 노숙의 밤거리 곳곳에서, 지하도 입구에서,
신문지 몇 장 덮고 밤을 지새는 형제들에게 빛을 주는 촛불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 촛불들 활활 타올라, 형제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장작불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큰 것을 쫓느라 작은 것을 놓치기도 합니다. 이 잔혹한 겨울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미국의 회개와, 세계 평화, 반전, 반핵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지금 당장 우리 옆에서 얼어죽어가는 형제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또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겠습니까.

나는 미선이, 효순이, 두 소녀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던 촛불들이 마침내 두 소녀를 부활시키고 있듯이 그 촛불이 이 겨울밤 거리에서 얼어죽어가는 수많은 노숙자 형제들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밤 우리는 모두 촛불을 들고 나가 노숙의 형제들을 일으켜세워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 촛불들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 당선자 또한 지금 당장 길거리로 달려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당선자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뜻한 사무실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높은 곳에 올랐으니 낮은 곳이 더 잘 보이겠지요. 이제 당선자께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와 더 낮은 곳으로 가야 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당선자님, 당신께서도 우리와 함께 지금 어서 거리로 나가시지요. 이 밤, 추위에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형제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습니까. 죽음보다 먼저 당신이 달려가야 합니다.

가서 그들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치료를 주고,
위안을 주고, 일자리를 찾아주셔야 합니다. 고난의 밤은 자꾸만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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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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