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장애 구필화가 한미순의 겨울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게 해주소서

등록 2003.01.06 08:05수정 2003.01.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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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우미의 문제로 애태우지 않게 진정한 사마리탄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도우미의 문제로 애태우지 않게 진정한 사마리탄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석희열
화려한 꽃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싱싱한 푸르름으로
피고 싶습니다


교통사고로 전신장애자가 된 여류 화가이자 시인인 한미순의 절규가 문득 황혼에 서럽다.


지난 3일 서울 거여동 그의 아파트로 그를 만나러 가던 날은 하늘에서 함박눈이 분분히 내리고 있었다.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있던 그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기자를 보자 흡사 새악시처럼 수줍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바깥에 눈이 내리나봐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침대가 놓여 있는 그의 방 한 켠에는 작업을 위한 컴퓨터와 캔버스, 팔레트가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3년째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마음씨 착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내온 따뜻한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고개를 들자 휠체어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참으로 신기하기도 해라. 손님이 오시는 날 하늘에선 또 함박눈을 다 내려주시고..."
천진스럽게 웃는 그의 표정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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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한미순 작)
'기다림' (한미순 작)
1984년 가을. 서른살.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한창 꿈에 부풀어 있던 그에게 천형같은 재앙이 찾아왔다. 교통사고.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병원으로 실려가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던 그가 한달 반만에 깨어났을 땐 목 위의 얼굴만 살아 있을 뿐 손과 발은 이미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그는 기막힌 현실에 절망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는 언젠가 그의 글에서 "절망이 개천을 이루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 그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필화가 김준호씨를 만나면서 자신의 장애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점차 원망과 증오와 절망의 수렁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우선 입으로 글을 쓰자."
펜을 입에 물고 그는 한 획 한 획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새 삶을 향한 그의 끈질긴 집념은 그로 하여금 1989년 세계구족화가협회 가입에 이어 1995년 정회원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추곡리 가는길' (한미순 작)
'추곡리 가는길' (한미순 작)
1995년 첫 개인전에 이어 1998년 제2회 개인전을 비롯하여 그 동안 다수의 작품전을 가졌다. 한편 문학활동도 꾸준히 하여 △땅에서도 하늘이 살아요(예찬사, 1990) △수묵화 필 무렵(밀알출판부, 1993)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왜 미움을(종로서적, 1998)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닌(도서출판 쉼, 2000) 등의 저서가 있다.

지난 세월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자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리 빠르고 허망한 기분이 들까요. 한 살 한 살 보태지는 나이가 끔찍할 뿐입니다. 시간이 저 혼자 질주한 것 같아요"라며 세월의 급류에 휩쓸려 온 자신의 삶을 애달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날에는 나도
현란한 세상옷을 입고 꽃이라 불리었소
얼굴 간지르다 지나가는 바람의 허무에도
교만한 꽃잎 나풀거리며
고운 모습 치장하기에 바빴더랬소


붓대롱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고 타이핑을 하는 여류시인 한미순의 '꽃'이란 싯구절이다. 그는 "내 감정을 표현하고 기도를 표현할 수 있어 글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붓을 입에 물고 유화에 몰두하고 있는 구필화가 한미순
붓을 입에 물고 유화에 몰두하고 있는 구필화가 한미순석희열
예술에 대해 "자기 완성을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며, 자기를 구현하고 자기세계를 천착(穿鑿)하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라고 정의한 그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싶지만 환경이 그렇지 못하다"며 우회적으로 이웃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는 그림으로 전신마비의 결박을 풀고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고립과 한계를 초월한 영혼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내는 작품들을 통하여 생명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고 밝혔다.

현재 세계구족화가협회에서 나오는 장학금으로 매달 100여만원의 보수를 지급하며 중국동포 도우미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가슴 속에 남아 있다"며 "이웃들의 왕래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잔설' (한미순 작)
'잔설' (한미순 작)
세상의 모진 풍파에 떠밀리면서 가끔은 버려지기도 했을 지난했던 그간의 고단함 때문일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 잠시 경련이 일어났다.

남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그에겐 도우미의 안정이 가장 절실한 문제다. 지난 1998년엔 도우미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119구조대가 와서 도와줄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래서 그의 새해소망은 노심초사하며 도우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평생을 함께 할 따뜻한 가슴을 가진 도우미를 만나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나의 몸을 고쳐주소서!"
우회하지 않고 직설적인 그의 기도는 간절했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에 지금의 도우미로 와있는 중국동포가 중국으로 떠나면 그땐 또 어떻게 도우미를 구할까 그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덧붙이는 글 | 한미순홈페이지 바로가기
한미순 자택전화  02-443-9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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