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맛있지? 안 뺏어 먹을 테니 천천히 먹어라."
"쩝쩝쩝! 쩌쩝! 쩝쩝쩝……!"
아침을 먹고 가라는 왕구명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안함 때문에 배고프지 않다 말하고 나섰던 이회옥이었다. 하루 종일 쫄쫄이 굶은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어떤 음식이 맛이 없겠는가!
그런데 만두는 정말 맛이 있었다. 어찌나 맛이 있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고, 배가 얼마나 부른지도 못 느낄 정도였다.
"하하! 에구, 이 녀석아! 안 뺏어 먹는다니까… 천천히 좀 먹어라. 그러다 체하겠다. 하하! 그렇게 맛이 있냐? 하하하!"
오랜만에 소홍주를 한잔 걸친 왕구명의 얼굴은 어느새 대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흐뭇한 시선으로 이회옥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몫이 담긴 그릇을 슬그머니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오늘은 왠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고, 안주가 없어도 술에 취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회옥은 왕구명의 만두까지 집어들고 허겁지겁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쩌쩝! 쩝쩝쩝! 끄으으윽! 쩌쩝! 쩌쩌쩌쩝…!"
간간이 트림까지 하던 그의 손이 멈춘 것은 그릇에 있던 만두가 모두 사라진 후였다. 그런 그의 배는 마치 올챙이의 그것처럼 볼록 튀어 나와 있었다.
"하하! 이제 배가 좀 불러? 녀석, 몹시도 허기졌구나. 내일은 아침을 꼭 먹어야 한다. 끄으윽! 어, 술이 취하는구나. 에구, 우형은 이만 가서 자야겠다. 넌, 욕실에 가봐라. 물을 데워 놓았는데 이젠 씻기 좋을 정도로 식었겠다. 끄으으윽!"
어느새 취기가 오른 왕구명은 역간 혀가 말린 듯한 소리를 하고는 자신의 침실로 향하였다.
"혀, 형…! 흐흑!"
욕실에는 왕구명의 말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있었다. 이것은 본 이회옥은 또 다시 눈 두덩이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잔뜩 습기를 머금었던 그의 눈망울은 콧날이 시큰해짐과 동시에 또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다음날 이회옥은 왕구명이 준비해 준 아침을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왠지 오늘은 적당한 값을 받고 비룡을 팔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왕구명에게 멋진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의 의복이 몹시도 낡았다는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장삼 한 벌을 선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이었다. 다리가 아프도록 하루종일 돌아다녔으나 여전히 비룡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실망 때문에 축 늘어진 어깨로 청룡무관으로 돌아온 그는 텅 빈 연무장을 보고 오늘부터 왕구명이 야간에 근무한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시작하였다. 사실 청룡무관은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 지저분했었다. 부친의 사망 이후 실의에 빠진 왕구명이 제대로 청소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회옥은 청소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넓디넓은 태극목장을 청소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하였다. 다시 말해 청소에도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몇 날 며칠을 해도 표도 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회옥에게는 남달리 청소를 잘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청소라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일지도 모른다. 귀찮고 지저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할 바엔 기분 좋게 하라는 부친의 말에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면서 청소를 했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과 자진해서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청룡무관은 눈에 뜨이게 청결해졌다. 지저분한 것들은 모두 치워졌고, 쓰러져 있던 병기대로 제 자리를 찾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십팔반 병기들 모두 병기대에 가지런히 정렬되었다.
오랜만에 드러낸 연무장의 바닥은 놀랍게도 단단하기로 이름 높은 운남(雲南)의 청석(靑石)이었다. 청룡무관 주위가 말끔히 치워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두 시진 정도였다. 역시 청소의 대가(大家)다운 솜씨였다.
"후후! 이젠 여길 좀 치워볼까? 에구…! 뭐가 이렇게 많아? 어휴…! 이걸 다 치우려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 되겠는데?"
캄캄한 밤이 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한 것이 흡족하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은 이회옥은 이번엔 서고에 발을 들여놓았다. 왕구명의 가문인 청룡무관의 전대 관주들은 무공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힘을 쏟았던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인의 가문에 서고가 있을리 만무하였고,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책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방 오 장 가량 되는 거대한 정실에는 팔 척 높이의 서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서가와 서가 사이는 어른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지날 공간 밖에는 없었다.
"어휴…! 형아는 분명 무인의 가문이라고 했는데… 이건 웬만한 서생들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책이 많잖아…?"
서고에 있는 서책의 수효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기만 권은 되어 봄직하였다. 태극목장에도 서책은 있다.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말에 관한 것이었다. 그 외에 있다며 아주 초보적인 것들뿐이다. 그렇기에 이회옥으로서는 세상에 이토록 많은 서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좋아, 여기에 얼마만큼 머물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한 많이 읽어 볼 거야. 아버지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셨어…"
이회옥은 가까운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사기(史記)? 흐으음!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사람이 쓴 거군. 흐음! 장군편(將軍編)이라… 어디 보자. 흐음! 등공(鄧公)이라…"
서책을 펼쳐든 이회옥은 이내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등공 하후영(夏侯瓔)은 패현(沛縣) 출신이다.
나중에 한나라 고조가 된 유방과는 친구 사이로, 유방이 사수(泗水)의 물가에서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그는 패현의 역사(驛舍)에서 일을 하던 하급 관리였다.
그는 사신이나 빈객들을 전송하고 빈 수레로 돌아올 때마다 유방을 찾아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쾌하게 떠들며 놀았다.
어느 날, 유방은 하후영과 심하게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기에 하후영은 가만히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유방을 관가에 고발하였다.
유방은 정장이었으므로, 사람을 상해(傷害)하면 중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관리로서 남을 다치게 하면 일반인들보다 그 죄가 무겁게 적용되었다.
더구나 유방은 도적을 추적하여 포박하는 정장의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고발이 들어오면 일단 철저한 조사를 거쳐 그 죄과에 따라 중벌을 받아야 하였다.
"네가 하후영을 때려 상처를 입힌 게 사실이렷다?"
사건을 담당한 판관(判官)이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하후영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유방은 이렇게 발뺌을 하였다. 사실 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장난을 하다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크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판관은 곧 피해자인 하후영을 데려다 물었다.
"대인, 유방과 소생은 친구 사이입니다. 그러니 그가 소생을 때릴 이유가 없지요. 이 상처는 제가 실수하여 난 것입니다."
"아니, 이 녀석들이 누굴 놀리고 있나?"
하후영의 말을 들은 판관은 화가 치솟았다. 증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니,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판관은 나라의 법을 우습게 아는 자들이라 생각하고 단단히 혼내줄 각오를 하였다. 판관은 하후영을 위증죄로 입건하였으며, 계속 고문을 가하여 진실을 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하후영은 매를 수백 번이나 맞고도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일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친구를 위해 의리를 지켰다. 그래서 유방은 형벌을 받지 않고, 전처럼 정장이란 관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하략) >
"으음! 등공이라는 사람은 정말 의리가 대단했구나. 일 년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끝끝내 발설하지 않다니… 이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사내들의 의리라는 것인 모양이구나."
사기를 펼쳐든 이회옥은 시간가는 줄 몰랐다. 너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휴, 이 녀석이…?"
새벽 무렵 근무 교대를 마치고 돌아온 왕구명은 깜짝 놀랐다. 은은한 달빛이지만 청룡무관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낙엽 등 쓰레기들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각 이회옥이 청소를 하였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흐뭇하면서도 어린 그가 이렇게 말끔히 치우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썼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회옥의 침상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자 화들짝 놀랐다.
혹시 청소를 해 놓고 떠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룡은 마굿간에 얌전히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청룡무관에는 십여 개의 전각들이 있었다. 제자들이 많을 때에는 이백 명이 넘는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전각들을 다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옥을 발견할 수 없던 그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바로 서고였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서가들 사이를 일일이 돌아다니던 끝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는 즉각 서책을 보다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보듬어 안았다. 침상으로 데려가 눕히기 위함이었다.
"어휴…! 녀석, 아예 새 털처럼 가볍군. 쯧쯧! 이래서야 어디… 에구, 지금 한참 자랄 나인데… 안 되겠군."
덧붙이는 글 | [안내말씀]
이 글은 앞부분의 설정을 모르시면 뒷부분이 재미없습니다.
따라서 귀찮으시겠지만 앞부분을 못 보신 분은 찾아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화면 아래쪽 "제갈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제갈천 배상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