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말을 도살하면 고기 값이 은자 세 냥이지."
"뭐라고요? 비룡을 도살한다고요?"
너무도 어이없는 대꾸에 이회옥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뭐, 팔기 싫으면 안 팔아도 되네. 한혈마의 고기 맛이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말고기는 흔하니까. 자, 팔 마음이 없으면 이만 나가주게."
"……!"
할 말을 잃은 이회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비칠비칠 물러났다. 하긴 그토록 애지중지하여 타지도 않던 비룡을 도살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왜? 그냥 나오느냐? 좋은 망아지인데."
왕구명은 이회옥이 비룡을 이끌고 도로 나오자 아는 척하였다. 보아하니 먹을 것이 궁하여 아끼던 말을 팔려던 것 같은데 그냥 나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
이회옥은 대답이 없었다.
"보아하니 갈 곳이 없는 것 같던데… 어디 갈 곳은 있느냐?"
"……!"
맥 빠진 이회옥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를 본 왕구명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이 녀석아, 갈 곳이 없으면 다시 와라. 배가 고파도 오고. 알았지? 우리 집은 청룡무관이라고 한다. 저기 보이는 지붕이 파란 기와로 덮인 집이야. 알았지?"
"……!"
이회옥은 귓전을 들리는 왕구명의 말이 꿈결에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 그의 뇌리로는 비룡을 도살하면 은자 세 냥이라는 말이 맴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있는 점 하나 때문에 천 냥 가치는 충분한 비룡을 겨우 은자 세 냥에 팔려면 팔라는 말을 하는 노인의 비웃는 듯한 얼굴을 떠올린 이회옥은 멍한 표정이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누구슈? 어! 너는 아까 그… 하하! 어서 오너라!"
일경이 다 되어 가는 깊은 밤, 밖에서 들리는 힘없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던 왕구명은 문 앞에 서있는 이회옥을 보고 반갑게 맞아들였다. 왠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 몹쓸 병에 걸려 죽은 아우가 떠올라 이처럼 친절하게 구는 것이다.
이회옥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혹시 비룡의 진가를 알고 사 줄만한 곳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단 한 군데도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품에는 은자 한 냥이 있었지만 그것은 낮에 보았던 소녀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루종일 쫄쫄 굶고 다녔다. 오늘로서 꼬박 사흘을 굶은 그는 갈만한 곳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갈만한 곳이 없었다. 혼자 몸이라면 아무 데나 가도 되겠으나 비룡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먹이도 먹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청룡무관을 찾은 것이다. 어렴풋이 듣기는 하였지만 푸른 기와를 얹은 집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배가 몹시 고픈 모양이구나. 잠깐만 기다려라. 맛은 없겠지만 허기는 메울 수 있을 거다. 자, 여기에서 기다려라."
"아저씨,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 고맙긴… 무림에선 사해(四海)가 다 동도라 한단다. 그러니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오래 전에 죽었지만 내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단다. 그때 그 아이가 딱 너만했었지… 휴우! 너를 보니까 죽은 내 동생이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
"그나저나 네 망아지는 왜 안 산다고 하더냐? 내가 보기엔 좋은 망아지인 것 같던데."
"아저씨 이 망아지는 대완구예요. 그런데 겨우 세 냥을…"
이회옥은 비룡을 도살한다던 노인과의 일을 설명하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왕구명은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말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다하였다.
잠시 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을 본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이런 모습을 본 왕구명은 또 혀를 찼다. 아직 어린 소년이 얼마나 굶었으면 이럴까 싶어서였다.
다음 날 이회옥은 비룡을 팔아볼 요량으로 산해관 전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비룡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모습을 은밀한 어둠 속에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노인이 있었다. 무천장에 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이회옥이 이슥한 저녁나절에 청룡무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그는 잠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괘씸한 놈…! 놈만 아니었으면 저 망아지는 벌써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으이그, 아까워! 저걸 잘 길러서 총단으로 보내면 틀림없이 두둑한 상금이 내려질 텐데… 으음! 꼬맹이를 죽이고 뺏을 수도 없고… 제길, 어찌하면 될지 궁리를 해 보아야겠군…'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노인이 사라질 무렵 이회옥은 미안하다는 듯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얻어먹는 것도 한, 두 끼이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왕구명에게 벌써 이틀 째 얻어먹으려니까 몹시도 미안한 기분이 든 것이다.
"하하!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음! 오늘도 비룡이를 못 팔았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진흙 속에 박혀 있어도 진주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다. 자, 오늘은 특별히 건초도 구해놨으니 비룡이는 마굿간으로 데려가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후후! 특별히 너를 위해 맛있는 만두를 사다 놓았다."
"아, 아저씨…!"
"후후! 고맙지…? 하하! 고마우면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먹자. 네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나까지 출출해졌구나."
"아, 아저씨…!"
이회옥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왕구명의 친절에 왠지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 두덩이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하하! 어서 가자니까. 뱃속의 술 벌레들이 어서 넣어 달라고 야단이구나.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산해관에는 삼대 진미(珍味)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蘇)씨네 만두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하더구나."
"흑! 아저씨…!"
"에구…! 자꾸 아저씨, 아저씨 하는데 난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이야. 네가 자꾸 아저씨라고 하니까 왠지 내가 늙은 것 같다. 그러니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불러. 알았지?"
"아저씨…!"
"하하! 이 녀석이…? 아저씨라고 하지 말라니까? 내가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이렇게 늙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밖에 안 됐어. 넌 열 두 살쯤 되었으니까 너보다 겨우 열 살이 많은데 무슨 아저씨… 이제부터 형이라고 안 부르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았어? 그리고 넌 죽은 내 동생하고 많이 닮았어. 그러니까 나도 널 동생처럼 여길게."
"흐흑…!"
이회옥은 왕구명의 따뜻한 표정과 말, 그리고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하하! 녀석… 이제 보니 순 울보였구나. 하하! 내 동생도 그랬지. 자, 어서 들어가서 먹자. 만두가 다 식겠다. 만두는 식으면 맛이 없는 거란다. 하하! 오늘은 오랜만에 술도 한 잔 걸쳐야겠다."
신이 난 듯한 왕구명은 이회옥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왕구명이 이토록 신나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부친이 죽은 이후 타인과 함께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같은 음식이라도 혼자 먹으면 맛이 덜한 법이다. 그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마지못해 끌려 들어가는 듯한 표정을 짓던 이회옥은 아주 작은 음성으로 입을 열어 보았다.
"혀, 형…!"
"어! 방금 뭐라고 했느냐? 방금 형이라고 했느냐? 그랬지? 하하! 오늘 기분이 아주 좋구나. 하하하! 하하하하…!"
아주 작은 음성이었지만 왕구명은 즉각 알아듣고 환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회옥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하! 좋아, 오늘 나 왕구명에게 동생이 생겼구나. 하하! 오늘같이 기쁜 날엔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지 않을 수 없지. 하하! 하하하하! 좋다. 좋아! 하하하하!"
이회옥에게는 형이 없었다. 그렇기에 태극목장의 다른 아이들에게 형이나 누나가 있는 것을 몹시도 부러워하였었다. 그러면서 저런 형이 있고, 누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었다. 하여 모친에게 형이나 누나를 낳아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그를 보면서 이정기나 곽영아는 박장대소를 하였다. 동생이라면 모를까 어찌 형이나 누나를 낳을 수 있겠는가!
왕구명은 어릴 때 죽은 동생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두 살 차이였던 동생과의 우애는 이곳 산해관에서 알아줄 정도였다. 그토록 잘 지내던 동생이 몹쓸 병에 걸려 죽을 때에도 그는 거의 보름 동안이나 먹지도 자지도 않고 병구완을 했었다.
모친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등졌다. 하여 동생을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는 자신이 모친의 몫까지 하여야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는지 동생을 끔찍하게 여겼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동생과 이회옥은 많이 닮았다.
장난꾸러기처럼 생긴 외모가 그랬고, 체구며 덩치까지 거의 흡사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왕구명은 왠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회옥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 하여 이토록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안내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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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제갈천 배상
** "전사의 후예"는 당분간 매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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