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님의 악역을 지지하며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슬픔을 나누려는 젊은 벗이 띄우는 글

등록 2003.01.16 11:07수정 2003.01.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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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항상 ‘선한’ 사람입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사람들이죠. 너무나 도덕적인 세상의 반영일까요, 아니면 그런 선함이 허구에서나 가능하다는 조롱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더러운 세상을 도덕이라는 ‘위선’으로 포장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일까요? 조직폭력배의 팔뚝에 새겨진 ‘착하게 살자’는 문신처럼, 현대사회에서 착함이나 선함은 그 반대편 극단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비뚤어진 세상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는 지식인의 설교보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가 더 어울리는 듯 합니다.

홍세화 선생님은 ‘착한 사람’, ‘선한 사람’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향해 악다구니치는 ‘악역’을 맡으려 하시는군요. 등 떠밀어도 하기 쉽지 않을 일을, 스스로 선택하셨군요. 지식인들의 이상향, 프랑스를 버리고 자기 몸에 배인 습속의 근원인 한국을 스스로 찾아 오셨군요. 편하게 비판하면서 멋있게 보일 수 있는데도 스스로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군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라 부르려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불러왔던 수많은 선생님들에게서 볼 수 없던 모습을 찾았기 때문에 기꺼이 선생님이라 부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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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한겨레신문사

얼마 전 선생님의 세 번째 책이 나왔더군요. 사실 그 이전 책에서는 그리 감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선생님이 피했으면 했던 “프랑스 사회를 추켜세우고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비판하였다”는 비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죠. 그런데 이번에 나온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선

“‘프랑스 사회를 잣대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는 비판을 기꺼이 감수한다”(18쪽)

고 선언하셨더군요. 할 말을 잃어버려 방황했습니다. 악역을 맡겠다는 그 ‘당당함’,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느끼는 ‘슬픔’, 계속 앞으로 나가겠다는 ‘택시운전사의 자신감’이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선생님보다 한참 부족한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저는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보다 슬픔만을 부둥켜안고 살았으니까요. 이제 그 슬픔을 보듬어 안고 조금 더 당당하고 자신감있게 세상을 살아보려 합니다. 같이 걷는 선생님이 있으니까요.

선생님은 공화주의를 많이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공개념과 사회정의와 평등사상이 비어있는 공화국이라는 껍질 속에 사회귀족 체제가 자리잡은, 겉은 ‘공화국’이지만 속은 사회귀족 체제인 것이 우리의 정체이고, 우리가 헌법 제1조로 꿰차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정체(正體)”(27쪽)


라는 것을 밝히시려는 거겠죠. 아마도 ‘사회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구호가 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봅니다.

사실 저도 그 구호를 좋아합니다. 제 기억 속에서 ‘질서’라고 하면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제식훈련이나 두발단속, 시위진압, 뭐 이런 것들만 떠올라서요. 사실 저는 체질적으로 질서보다 무질서를 더 좋아하지만요. 그래서인지 그게 꼭 공화주의로 귀결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헌법만큼 공화주의라는 말도 멀게 느껴지거든요. 물론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건 공화주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내용’이겠지만.


‘사회정의’라는 공화주의의 핵심도 저에게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킵니다. 어릴 적 기억 속의 ‘사회정의’는 전두환 아저씨의 립싱크였고, 조금 크고 난 뒤의 ‘사회정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단결’이라는 말도 조금 걸립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현실적인 기존의 힘들, 즉 권력과 금력에 맞설 수 있는 우리들의 힘은 다만 단결에서 온다. 단결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결의 힘’이다”(207쪽).

98% 동의합니다. 하지만 2%가 찝찝하게 남아서 단결이라는 구호 밑에 숨죽여야 했던 그 많은 욕구들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단결이라는 말엔 너무나 많은 ‘구멍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사회의 축소판인양 큰 것들이 아니라 작은 것들만 줄창 볶아대죠.

작은 사람들은 자기 일상 속에서 아주 ‘소소하게’ 삶을 변화시켜가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거창한 ‘단결’이라는 구호가 없어도 서로 이해하고 기대곤 하죠. 사실 제가 선생님께 불만을 가지는 것은 너무 큰 것만 보신다는 거죠. ‘사회귀족’들이 지배하는 ‘큰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밑에는 ‘작은 사람들’이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작은 세상’도 있답니다. 신문 한 귀퉁이에조차 이름이 실리지 않는, 왔다갔다하는 ‘철새’들이 보면 코웃음칠만한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 다니는 작은 사람들이 있답니다. 작은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하면서, 대중이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도우려는 거죠. 제가 만난 작은 풀뿌리단체의 활동가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강조하는 ‘왜?’라는 물음, 어릴 적부터 시작되는 토론 문화도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대안학교운동에서 조금씩 자리잡아 가고 있지요. 그런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게 제 투정입니다. 작은 것일수록 똘레랑스하기 쉬워지죠.

‘사회귀족’이라는 말 굉장히 맘에 듭니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군림하는 한국의 사회귀족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통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부문으로부터도 검증받거나 견제당하지 않는다”

(31쪽)는 지적, 너무 정확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사회귀족은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과거의 귀족보다 훨씬 더 ‘신분 귀족적’이다. 과거의 귀족이나 양반은 토지 등 물적 토대가 없어지면 자연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오늘의 사회귀족은 일단 반열에 오르기만 하면 그동안 축적한 자본과 다른 귀족과의 인맥을 비롯한 각종 상징 자본이 있으므로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38쪽)

는 말, 동감, 공감합니다. 그런 썩어빠진 사회귀족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악역을 맡는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한국의 지식인과 문인의 상징 자본을 곧바로 겨냥”

(61쪽)하기에 강준만 교수를 지지한다는 말도 지지합니다. 특히 이 부분이 좋았습니다.

“지금 여기의 극우 헤게모니와 싸우지 않으면서 리얼리즘이니 민족문학이니 민중문학을 말하는 문화인을, 시민운동이니 사회운동을 말하는 운동가를, 여성해방을 말하는 여성운동가를, 통일을 말하는 통일운동가를, 탈정치니 문화연구니 떠드는 문화연구가를 나는 마음껏 비웃을 것이다”(110쪽)

이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때가 된 거죠.

그런데 조금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사회에서 핵심적인 코드를 건드리지 않으셨더군요. 바로 ‘서울대’라는 권력을. 선생님이 엘리트의식을 벗어났다고 해서 다른 서울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학벌없는 사회만들기’ 운동이 주춤해진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선생님의 주장은 뭔가 허공을 맴도는 듯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한국의 교육과정은 사회적 책임의식이 결여된 극소수의 사회귀족 예비군을 추려내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과정”

(292쪽)입니다. 그 정점에 무엇이 서 있습니까?

“교육부 관료들과 사학은 아주 끈끈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다”

(296쪽)는 말, 맞습니다. 무엇이 그런 끈끈한 유착을 가능하게 합니까? 저는 서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번 책에서 부쩍 ‘시민의식’을 많이 얘기하십니다. 당연히 시민의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로 시민의식을 거론하며 대중의 ‘저급함’을 얘기하는 것은 선생님이 싫어하는 조선, 중앙, 동아입니다. 연예인의 춤동작 하나에, 뮤직비디오 하나에 사회의 성도덕이 무너진다며 호들갑떠는 ‘도덕적인’ 지식인들의 무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얘기에서 계몽선각자의 말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계몽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따르라고 외치던 그 수많은 계몽선각자들이 ‘철새’나 야리꾸리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우울함에 잠기곤 합니다. 그리고 시민의식은 무조건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뭘 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부여받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 거론하시는 교육이나 언론같은 큰 문제에선 그런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민자치센터나 지역운동에서는 그런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한 것이죠. 선생님이 자주 얘기하는 그람시는 이런 말을 남겼군요.

“참된 철학적 운동이란 몇몇 제한된 지식인 집단 사이의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 데 그치는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도 결코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언제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잘 부치신다는 빈대떡을 먹으며 술잔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똘레랑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정리된 후에 만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몸이 아프면 생각마저 무너진다는. 선생님, 건강하세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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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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