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초록이던 여름이 지나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만천하가 온통 백색으로 뒤덮인 겨울이 되었다.
"후후! 이번에도 진 모양이구나. 녀석, 정말 많이 늘었는데… 후후후! 그래도 무슨 묘수(妙手)가 없을까?"
"하하! 형, 이제 그만 포기 해. 이 판도 형이 졌어."
왕구명은 대마(大馬)가 몰살당하게 생겼지만 웃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이회옥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왕구명은 대마가 죽게 생겼는데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요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바둑만 해도 그렇다. 처음 가르칠 때에는 열 점을 깔아 주고도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요즘엔 거꾸로 석 점을 깔고도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청출어람 청어람이었다. 스승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는 제자가 자신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회옥은 정말 훌륭하게 그것을 이뤄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청룡갑 때문에 불편해 하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결과였다. 게다가 며칠 전에 시작한 서예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아직은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꾸불꾸불하지만 이제 조금만 더 힘을 기르면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하하! 녀석, 졌다. 좋아, 오늘로서 대국은 끝이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수를 늘려가도록!"
"형, 고마워, 이 모든 게 다 형의 덕분이야."
"하하! 오늘처럼 기쁜 날 술 한잔 안 할 수 없지. 우형은 술을 사러 갔다 올 테니 너는 우형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라."
"알았어 형! 솜씨를 발휘해 볼게."
주방으로 들어간 이회옥은 능숙한 솜씨로 돼지고기를 썰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만드는 동안 눈 시위를 붉히는 사람이 있었다. 술을 사오겠다던 왕구명이었다.
그는 오늘 사면호협의 명에 따라 남해까지 갔다오라는 명을 받은 바 있었다. 반 년 전에 그곳으로 향한 추수옥녀가 잘 있는지 알아보고 서찰을 전해주라는 것이었다. 무천장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철저한 곳이다. 따라서 한 번 명이 떨어진 이상 따르는 것 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왕구명은 아직 어린 이회옥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 많고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하필이면 자신을 지목하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은 장주의 눈에 들어 그런 것이라며 한턱내라고 난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무천장에 몸담은 지 오래되었지만 사면호협과는 시선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대화는 더더욱 없었다.
자신보다도 하위직급인 수문위사들의 수효가 적어도 이십여 명은 되었고, 자신과 같은 순라는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 많고 많은 인물들 가운데 자신의 이름까지 꼭 집어서 남해로 보내라고 한 것이 못내 이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이라면 자신과 같은 최하위직에 있는 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장주의 금지옥엽인 추수옥녀와 대면이라도 해본 고위직이 맡을 일이다. 그래야 경계심을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감히 장주에게 반문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복명을 하고 물러났던 것이다.
멀고 먼 남해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일 년은 걸릴 것이다. 갔다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무공이 약한 자는 자칫 비적을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동안 청룡검법 후반부를 부지런히 연마하여 웬만한 비적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은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다.
삼 년에 한번 벌어지는 승차대회에 나가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적 따위에게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이회옥에게 긴 이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말을 꺼내면 어떤 반응일까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한번도 헤어질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둑을 두면서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만방으로 깨진 것이다.
지금껏 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만방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술을 사오겠다고 일어섰던 것이다.
'휴우…! 불쌍한 녀석…!'
잠시 이회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구명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이 순간 그의 흉중에는 떠나더라도 이별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어리고 있었다.
말을 꺼내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이회옥이야 아직 어리니 눈물을 흘리더라도 상관없으나 자신은 대장부였다. 대장부가 어찌 어린 애 앞에서 눈물을 보이려 하겠는가? 그렇기에 입을 다물려는 것이다.
"바보같이… 이걸 글자라고 썼어? 큭큭! 지렁이가 기어다닌 것 같아! 큭큭!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지? 형! 혀엉…!"
-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우 옥아에게.
네게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미안하구나. 우형은 장주의 명에 따라 멀고 먼 남해까지 갔다와야 한다. 잠시라도 너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하지만 어쩌겠느냐?
금방 다녀올 터이니 열심히 수련하고 있거라.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절대로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형이 돌아왔을 때 적어도 세 치가 안 자라 있으면 볼기를 칠 것인 즉 열심히 먹어라. 알았지?
그럼 다녀오마. 몸 건강히 있어야 한다.
우형 왕구명 서(書)
이회옥은 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삐뚤삐뚤하면서 크기도 제각각인 글씨를 보면서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치잇! 이제 보니 형은 순 거짓말쟁이야. 이렇게 글씨도 개판으로 쓰면서 나한테 맨날 글씨 못쓴다고 호통이나 치고… 나야 청룡갑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형은 맨몸이면서… 지금까지 순 거짓말만 했나봐. 흐흑! 형, 보고 싶어. 흐흑! 혀―엉!"
이회옥은 출근하겠다고 나간 지 삼 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퇴근하지 않는 형이 이상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오랫동안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왕구명이 돌아오지 않자 문득 장난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이는 열 살이나 많으면서도 장난을 칠 때에는 자신보다도 더한 장난꾸러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왕구명의 처소를 살피던 중 곱게 접혀 있는 서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문진(文鎭: 종이 따위를 눌러두는데 사용하는 물건) 아래 놓인 그것의 위에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 이회옥 친전(親展) >이라 쓰여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그것을 펼쳐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형! 내가 바본 줄 알아? 여기서 남해면 엄청나게 먼 데잖아. 흐흑!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형! 돌아와! 혀어어엉…!"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늑대 떼에 의하여 부친 등 태극목장의 식솔들이 한꺼번에 당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였고 한번도 홀로 되어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몰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산해관까지 흘러오는 동안 홀로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끼니때가 지나도 누구하나 음식을 먹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 되어도 잠자리를 걱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인데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갔다. 찬비에 젖어 몸이 불덩이가 되어도 누구 하나 이마를 짚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왕구명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고 친형처럼 따랐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비빌 언덕이라도 있으면 마음의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회옥은 어린 시절 강아지를 기른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개는 내놓고 기르는 법이라 하였지만 그는 몰래 이부자리 속으로 데려와 품에 안고 잠들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먹던 밥을 남겨 몰래 강아지에게 주었다.
강아지도 이런 정성을 아는지 온갖 재롱을 부려 흐뭇하게 해 주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가운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였고, 눈에는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저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숨만 할딱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회옥은 노심초사하며 간호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틀 후, 죽은 강아지를 뒷동산에 묻고 돌아오던 날 이회옥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불과 몇 달 동안의 인연이었지만 너무도 깊은 정이 들어 있었던 때문이다.
이 같이 강아지와의 이별에도 애통해하던 그였기에 왕구명과의 느닷없는 이별이 너무도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런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아지는 자신이 돌봐주어야 했지만 왕구명은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이 잘 되기를 바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던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왕구명이 친형처럼 느껴졌었다는 것이다. 친형과의 생이별에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여 그의 눈에서 눈물이 샘솟듯 솟은 것이다.
한참 후 간신히 진정한 그는 텅 빈 연무장으로 내려가 미친 듯이 봉을 휘둘렀다. 이별의 슬픔을 희석시키기 위함이었다.
'형! 잘 갔다와. 형이 돌아 왔을 땐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거야. 열심히 할 게. 그래서 형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청룡갑을 걸치고 있기에 봉의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엔 허공을 가를 때면 예리한 파공음이 여지없이 터져 나왔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얼마 후면 원단(元旦)이고, 열 다섯이 된다. 워낙 열심히 수련에 임했기에 이회옥의 신체는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근육질이었다. 하지만 청룡갑은 그 근육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풍자무협소설>전사의 후예"가 오마이뉴스로부터 고정 연재실을 배정 받았습니다. 하여 지금은 "문화면" 좌측 연재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잉걸"이나 "생나무 목록"에서 찾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연재의 성실도, 독자의 반응, 기사의 수준을 고려하여 메인 화면 좌측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리즈"로 배치되기도 한다는군요.
한시바삐 그곳에 자리를 배정 받아 여러분들의 수고를 조금 더 덜어드렸으면 하는 것에 제 소망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앞부분을 못 보신 분은 죄송하지만 앞부터 읽어 주십시오. 나중에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하면서...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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