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높아진 한국 자긍심 반영
미, 유력인사 북한에 특사 파견해야"

한화갑 민주당 대표 코리아 소사이어티 연설

등록 2003.01.28 19:49수정 2004.01.0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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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화갑 민주당 대표

한화갑 민주당 대표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28일 "(북한과의) 협상이냐 아니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며 "지금도 미국이 북한에 유력한 인사를 특사로 파견하는 것이 유효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덧붙여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전통적인 우방국이라는 관점에서만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이날 오전 뉴욕에 위치한 코리아 소사이어티(이사장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를 방문해 이같이 밝히고 "대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원칙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이 동의하면 기술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 대표를 수행 중인 장전형 부대변인이 전했다. 이 자리에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에 가입돼 있는 뉴욕의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 대표는 이어 부시 대북강경책과 관련 "지금은 냉전의 절정기 당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강경한 외교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며 "한국민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또 한국의 촛불시위는 미국 언론들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반미시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평화로운 촛불시위"라고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주한 미 대사관 앞의 이런 대규모 시위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기는 하다"며 "이런 분위기의 배경에는 한국민의 고양된 자긍심, 특히 젊은 세대의 높아진 자주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대표는 두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에 대해 "만일 미군과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한국 내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며 "좀더 일찍 한미 양국의 사법제도나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사과하고 사고의 재발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상황은 나아졌을 것"이라고 미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했다.

a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코리아 소사이어티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코리아 소사이어티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다. ⓒ 장전형

한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을 배격하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신봉자라고 소개하고 "그는 주한 미군 철수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한미동맹 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당선자가 일부 미국내 언론에 의해 반미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 관련 "그런 오해는 대선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적인 언론과 집단이 부추긴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 대표는 북한에 적대적인 미국내 여론을 감안한 듯 "한마디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네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고 윽박지르는 망나니에 비유할 수 있다"며 "그렇다고 북한이 언젠가는 반드시 불을 지르리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그레그 코리아 소사이어티 이사장은 연설이 끝난 뒤 한 대표에게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인, 정부인사가 방문해 한 연설 가운데 한 대표의 내용이 가장 좋았으며 현재의 한미관계나 대북관계에 대한 한국측 입장을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밝혔다"며 극찬했다고 장 부대변인은 전했다.

[클릭!]한화갑 대표 THE KOREA SOCIETY 영문 연설문 전문

다음은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연설문 전문이다.

진정한 우정은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납니다
- 과도기의 한미 관계와 대북 정책의 방향 -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은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요즘 상영중인 < 007, Die Another Day >에 묘사된 한국말고, 진짜 한국말입니다. 또 한미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벌어진 전쟁에서 7만여명의 미군 사상자를 냈던 곳. 아직도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3만여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곳.

요즘 그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 때문에, 여러분들 가운데 일부가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언론들이 수만명, 수십만명의 한국인들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반미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어떤 언론은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지 모른다고 점치고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의 이런 당혹감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저는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찾았습니다. 조만간 같은 목적으로 특사가 미국에 들를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역시 취임 직후 미국을 방문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한국민들 역시 달라진 미국 정부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 기간 중에 부시 현 대통령은 민주당의 지나친 개입주의 외교를 비판했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벌이는 미군의 작전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반면 지금은 냉전의 절정기 당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강경한 외교 노선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국민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국민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배제된 채, 대북 정책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이 변화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제게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싶을 것입니다. 9·11 사태 같은 것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저는 이번 방미를 통해, 한국과 한미 관계에 관심이 있는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그런 설명을 충실히 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제 입장을 설명할 것입니다. 저에 이어 미국을 찾을 특사나 대통령 당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런 과정을 통해, 현재 한미 두 나라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힐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대화로 풀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지난 2000년 부시 행정부 출범 당시 미국을 찾았던 저는, 이미 한 차례 그런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당시 저는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던 새 정부와 의회 인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 베이커 전 장관을 비롯해, 많은 뜻 있는 미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과 미국 정부는 대북 정책에 대한 이견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만큼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말을 실감한 적도 없었습니다.

□ 현재의 시위는 결코 반미 시위가 아닙니다

우선 제가 먼저 한국과 한국민의 입장을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해 6월 이후 서울의 미 대사관 앞에서는 종종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시위는 미국 언론들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반미 시위가 아닙니다.

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평화로운 촛불 시위입니다. 이 시위에는, 세계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벌어지는 반미 시위의 단골 메뉴인 '양키 고 홈'이 결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구호를 철저히 차단합니다.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와 주요 언론들이 반미 감정 확산을 철저히 경계하고 나섰습니다. 대통령 당선자는 아예 이 촛불 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주한 미 대사관 앞의 이런 대규모 시위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의 배경에는, 한국민의 고양된 자긍심, 특히 젊은 세대의 높아진 자주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7년의 아시아 외환 위기를 성공적으로 벗어난 한국은 현재 세계 11위권의 경제력을 자부합니다. 세계 경제가 모두 어려운 지난 해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게다가 2002 한일 월드컵을 통해 한국민들은 조국의 위상과 자신들의 자부심이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자신감이 남 다릅니다. 그들은 한국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들과는 달리, 모든 국가들간의 관계가 동등하고 호혜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불행하게도 바로 이런 시기에 두 여 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두 미군 당사자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만일 미군과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한국 내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좀 더 일찍 한미 양국의 사법 제도나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사과하고, 사고의 재발 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상황은 나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측의 대응은 너무 늦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한미 관계가 불평등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그 동안 한국 내에서 미군의 지위를 규정한 SOFA(한미 주둔군 협정)가 불공정하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돼 오던 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주한 미군의 지위가 독일이나 일본 주둔군보다 더 낫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해왔습니다. 미군 주둔의 역사를 보더라도,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쟁 당사국인 반면 한국은 동맹국이 아닙니까?

SOFA는 1967년 체결됐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미군은 한국 내에서 5만건이 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마다 SOFA 개정 요구가 비등해지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이 협정을 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SOFA 개정 요구가 반미 운동으로 변질되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주한 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도 비슷하다고 비슷합니다. 이 시위의 목적은 이 협정의 불공정한 부분을 고치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한미 관계를 더욱 튼튼한 토대 위에 올려놓자는 것입니다.

□ 대통령 당선자의 한미 동맹 관계에 대한 굳은 신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는 달리 미국을 방문했던 적도, 이 곳에서 생활했던 적도 없습니다. 비록 전체적인 맥락은 생략된 채 전달됐습니다만, 미국에 굽실거리지만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도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대선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적인 언론과 집단이 부추긴 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 김대중 대통령 역시 사회주의자라고 매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도 오히려 지나치게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편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냉전의 틀을 깨지 못한 한반도 상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신봉자입니다.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경제를 오랫동안 옭아매왔던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불투명성과 불공정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래야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더욱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주한 미군 철수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한미 동맹 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합니다. 오히려 한미 관계를 새로운 세기에 걸맞게, 더욱 튼튼히 하는 것이 한국의 생존과 번영에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격식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통령 당선자의 스타일을 고려해볼 때, 조만간 이뤄질 한미 정상 회담은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 북한은 왜 지금 도발하나?

여러분들은 북한에 대해서도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북한이 왜 지금 위기를 고조시키나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9·11 테러 이후 현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 마당에, 북한은 기습적으로 핵 동결 조치 해제와 핵확산조약(NPT) 탈퇴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해왔습니다. 정말로 북한이 미국과 한 번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일까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북한의 입장을 알아야만 합니다. 북한은 현재 세계의 '고립된 섬'입니다. 이 전제주의적 공산주의 국가는 생존을 도모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더욱이 최근 들어 식량과 연료난은 더욱 심각해져, 수백만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던 90년대 초반을 방불케 합니다.

1차 북한 핵 위기가 94년에 벌어졌던 것을 상기해보십시오. 당시에도 북한은 핵 무기를 담보로 경제적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북한이 똑같이 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북한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네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고 윽박지르는 망나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언젠가는 반드시 불을 지르리라고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북한은 개방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신의주를 경제 특구로 지정하고 외국인을 초대 행정 장관으로 임명한 바 있습니다. 중국식 개방의 전철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돌연 위기를 고조시킨 북한의 태도에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깔려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출범 직후 정책 재검토를 거쳐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북한이 본격적인 개방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다 9·11 사태와 부시 대통령의 연두 교서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이 급선회한다고, 북한으로서는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폐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나라와 50여년 동안 상대해온 한국민들이 추측하건대는 그렇습니다. 북한은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중유 공급 중단 조치가 이어지자 북한의 막연한 불안감은 좀더 구체적이 돼 갔습니다. 더욱이 북한 정부는 냉전 체제를 승리로 이끈 데 대한 자부심이 강한 미 공화당 정권이, 냉전 식의 대결 구도를 자신들에게 강요할지 모른다는 피해 의식을 평소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정부는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붕괴시키려 하거나 붕괴를 방관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이런 판단에서 북한은 전격적으로 핵 카드를 뽑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한 번 써본 적이 있는 낡은 수법이지만, 보다 직접적인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미국 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모색하는 상황에서는 쉽사리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 하리라는 계산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런 정황이 의미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만일 미국이 이라크에 이은 제 2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북한의 체제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향후 대북 정책의 요체입니다.

□ 북한과 이라크의 차이점

저는 미국 정부나 의회, 그리고 씽크 탱크 안에서 북한이 과연 이라크와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미국의 대북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전제이기도 합니다.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과 이라크는 세계 평화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공통점입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두 나라를 모두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두 나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 현재 북한은 테러나 테러 지원 행위를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테러 지원 의혹을 받는 이라크와 다른 점입니다. 물론 80년대까지는 북한 역시 직접 테러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 반테러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북한은 테러를 포기하고 과거의 테러 행위 가운데 일부(일본인 납치)를 국제적으로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둘째, 북한은 지정학적 여건에서도 이라크와는 크게 다릅니다. 북한은 남으로는 휴전선을 경계로 아시아 4대 경제국인 한국과 면해 있습니다. 현재 남북한은 휴전 상태입니다. 즉 언제고 전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한 주변에는 경제 규모에서 아시아 1, 2위를 다투는 중국과 일본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곳은 아시아의 심장부입니다. 이 곳이 잘못 되면 세계 경제는 날개 하나를 잃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라크를 겨냥한 미국의 '예방적 조치'(preemptive action), 즉 선제 정밀 폭격은 북한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과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은 다릅니다. 후세인이 순교자를 자처해 회교권의 동정과 지지를 유도하려 하는 반면, 김정일은 그런 배후 세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북한 체제의 존립만이 목표입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따름입니다.

□ 대북 정책에 대한 한미 양국간의 조율

대북 정책만을 놓고 본다면, 한미 두 나라간에는 '이해의 갈등'(conflict of interest)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를 없애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북한의 무기로 인한 위협도 제거해야 하지만, 전쟁과 북한 체제의 붕괴로 인한 위험도 줄여 나가야 합니다.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에 매달리면서, 미국에 대해서도 대화를 계속 촉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전쟁과 북한 체제 붕괴로 인한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당사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수십년간 피땀 흘려 이룩한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비극입니다.

저는 대화와 타협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부의 일관된 대북 정책, 이른바 햇볕 정책(Sunshine Policy)에 대해 미국 행정부와 의회 내에 일부 이견이 있는 것을 압니다. 협상 대상국인 북한에 협상 전략을 다 내보이고, 어떻게 효과적인 협상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견입니다. 특히 옛소련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군비 경쟁이 냉전을 승리로 이끈 요인이라고 믿는 분들이 이런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2000년 제가 방한했을 때도 상당수 공화당 인사들이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북한 역시 협상 전략을 다 노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1차 북한 핵 위기를 거치는 동안 북한은 핵 협상을 통해, 오로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와 경제적 지원이 최대 관심사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한국을 침공하거나 주변국을 괴롭힐 의지나 능력이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제 북한 핵 협상은 목표가 분명한 게임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가 보장받기를 원하고, 국제 사회의 도움을 원합니다. 한국은 이미 5년여 전부터 북한의 목표를 도울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제 미국의 차례입니다. 미국은 그들에게 답해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합니다. 협상이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화하다 보면 서로 신뢰가 축적되고, 오해가 자리잡을 틈이 없어집니다. 대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원칙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이 동의하면 기술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난 번 방미 당시의 저의 제언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북한 체제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저는 지금도 미국이 북한에 유력한 인사를 특사로 파견하는 것이 유효한 해법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대화를 시작하고 신뢰를 쌓는 데 시간을 단축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미국과 북한만큼 시급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도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북 정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두 나라 관계가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에 미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전통적인 우방국이라는 관점에서만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한미 관계를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정학적 특성상 한국은 아시아의 세력 균형점에 위치해 있음은 물론, 아시아와 미주 대륙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저는 한국과의 우호 관계와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이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저를 비롯한 한국민들과 미국민들 사이에 허심탄회한 대화가 더욱 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한미 두 나라의 오랜 우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길입니다.

한국 속담에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된 시험을 거친 관계가 더욱 튼튼해진다는 말입니다. 저의 뒤를 이어서 특사단과 대통령 당선자의 미국 방문이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장시간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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