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영빈객잔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향기 그윽한 천품(天稟)인 천지차(天池茶)를 맛보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는데 화려하면서도 아늑하게 꾸며진 후원으로 안내되면서부터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하였다.
그리고 그윽한 천지차의 맛과 향을 즐기던 중 느닷없이 들이닥친 마면호의 말을 듣고는 안색이 창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자신들의 청백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청년에게 바쳐야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청타족은 여인이 배필을 선택하는 풍습이 있다. 그나마 잘못 선택할 수도 있으므로 혼례를 올리고도 일년간은 동침을 거절할 수 있다. 그 동안 신랑과 그 식솔들을 자세히 살펴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으면 다시 길일을 받아 그제야 동침하게 되어 있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행한 일생을 살지 않도록 하는 풍습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여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청타족 여인은 자신의 청백을 바친 사내에게 평생토록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청타족은 비교적 개방적인 서역의 여타 부족과는 달리 청백을 매우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생판 듣도 보지도 못한 사내에게 무조건 청백을 바치라 하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분노한 둘은 감히 족장의 여식인 자신들에게 무슨 망발이냐며 항의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면호의 다음 말을 듣고 사라와 유라는 자신들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깨닫고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말을 듣지 않는다면 강제로 욕을 보인 뒤 수없이 많은 사내들이 드나드는 매음굴에 팔아 넘기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사라 자매는 울면서 애원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매몰찬 표정을 지은 마면호는 잠시 후에 들어올 사내가 조금이라도 불쾌하였다는 기색만 보여도 그렇게 될 것이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고는 총총히 나가 버렸다.
이후 두 여인은 서로를 부여잡고 히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혹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하였다. 정실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던 중 만면에 득의에 찬 괴소를 머금은 마면호가 웬 청년을 데리고 들어섰다. 흠칫 놀란 두 여인은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귓전을 울리는 협박 때문이었다. 만일 얼른 일어나서 영접하지 않으면 즉각 매음굴로 보내질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전 처음 본 사내에게 어찌 아양을 떨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 청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여 두려움 때문에 손을 내 저으며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애원한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괴소를 머금은 채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후후후! 왜 다가오느냐고?"
"그, 그래요! 제발 가까이 오지 마세요. 허억! 아악 이, 이것 놓아요. 아악! 노, 놓으란 말이에요."
"후후후! 앙탈은… 어디 보자. 흐음!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던 계집이라 그런지 살결이 곱군."
손목을 잡힌 사라는 어떻게든 빼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청년의 손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하여 비명만 지를 수 있을 뿐이었다.
"흐음! 서역의 계집들은 중원의 계집들과 다르다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접해 보는군. 어디 보자… 호오! 소문대로 살결이 정말 백설처럼 희구나."
"허억! 아, 안 되요.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허억! 아아악!"
사라는 손목을 쓰다듬던 청년의 손이 화복 아랫자락을 헤치고 올라오자 비명을 질렀다. 이 순간 유라는 눈을 감은 채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기린의 은밀한 지풍에 아혈과 마혈을 제압 당했던 것이다.
"크흐흐흐! 가만히 있어! 크흐흐흐!"
생전처음 보는 금발미녀를 둘씩이나 차지하게 된 철기린은 입 맛을 다시면서 괴소를 머금었다. 맛이 있는 음식일수록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한번도 사내 맛을 보지 못한 여인과 그렇지 않은 여인에겐 차이가 있다. 전자는 아직 설익은 풋풋한 과실이나 마찬가지 맛이다. 반면 사내를 아는 여인들은 농익은 과실의 맛과 같다.
철기린은 농익어 달콤한 과즙(果汁)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여인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더 좋아하는 것은 풋풋한 과실을 따서 길들이는 것이었다. 풋풋한 과실이 농익은 과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즐겼던 것이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그에게 청백을 잃고도 크게 억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장차 천하를 호령할 그의 내자가 되는 지름길로 접어든 것으로 착각하고 온갖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철기린에게 청백을 잃은 여인 가운데 곁에 남아 있는 여인은 하나도 없었다. 실컷 즐긴 뒤에는 자신의 호위를 책임지는 십팔호천대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던 것이다.
십팔호천대원들을 거친 여인들은 그들의 수하들에게까지 보내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졌다. 이후 대부분의 여인은 스스로 목을 매거나 자진을 택하여 한 많은 세상을 떴다.
철기린의 이런 처사는 천하에 널린 것이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얼굴이 반반한 여인 역시 널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몇몇에 억 매일 필요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호천대원들로 하여금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상전과 같은 여인을 품었다는 일체감을 느끼게 함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충성심을 느끼게 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철기린은 오돌오돌 떨고 있는 사라와 유라는 제법 색다른 맛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뜸을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우선을 발가벗긴 뒤 몸매를 즐길 요량이었다.
"아악! 이, 이러지 마세요. 흐흑! 잘못했어요. 이러지 마세요."
사라는 화복 안쪽으로 파고드는 철기린의 손길에 진저리를 치면서 흐느꼈다. 이렇게 청백을 잃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던 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흐흐,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지? 잘못한 것 없는데? 크흐흐! 가만히 있어. 본좌가 네년들에게 황홀함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줄 터이니…"
음흉한 괴소를 베어 문 철기린의 눈에서 욕정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제 꼼짝없이 늑대의 발길에 아름다운 꽃 두 송이가 막 짓밟히려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소, 소성주님! 소성주님! 어서 나오십시오. 어서요."
이제 매듭 하나만 더 풀면 한번에 화복을 벗겨낼 순간이었다. 그러면 황홀한 정도로 육감적인 사라의 나신(裸身)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에 젖어 있던 철기린은 연신 들려오는 다급한 음성에 짜증이 났다.
"에잉… 누구냐? 누가 감히 본좌의 흥취를 깨느냐?"
"소성주님! 소, 속하 무흔입니다. 지금 성주께서 이곳에… 허억! 소성주님! 어서 나오십시오. 성주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뭐, 뭐라고…? 아버님께서? 허억! 아, 알았다."
세상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철기린이었지만 부친의 행차라는 보고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급히 사라의 의복을 내린 철기린은 유라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월동창으로 다가가 창을 열며 소리쳤다.
"너, 너희들은 어서 이곳으로 나가라."
"예…?"
꼼짝없이 겁탈 당하는가 싶어 절망에 빠져 있던 자매는 느닷없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서 나가래도… 나가는 즉시 멀리 멀리 사라져. 알았지? 만일 눈에 뜨이면 작살낼 거야. 알았어?"
"예? 아, 예…! 아, 알았어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판단한 사라와 유라는 지체 없이 창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곧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영빈객잔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일단의 사내들이 도열해 있기에 그곳으로는 향할 수 없었다. 반대쪽에는 외부로 통하는 쪽문이 있기는 한데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철기린이 장력으로 쪽문을 부순 소리였다.
퍼어엉―! 우지지지직!
"어서 가!"
"아, 알았어요!"
사라와 유라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부서진 쪽문으로 향하였다. 같은 순간 후원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내가 있었다. 천하무림의 명실상부한 지배자인 무림천자성주 철룡화존 구부시였다.
그가 들어서는 길목 좌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고수들이 장중한 표정을 지으며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에는 붉은 빛깔을 띈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과연 천하를 다스리는 무림천자성주의 행차다운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이제 메인화면 좌측에 자리한 "오마이뉴스 시리즈"에서도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를 감상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회색바탕)
일일이 찾아다니시던 불편을 덜어드리게 되어 매우 기쁘군요.
독자 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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