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님! 소자 신혁이옵니다. 헌데 어인 일로 이곳까지…?"
"흠흠! 볼일이 있어 왔다가 네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 순시는 잘하고 있겠지? 설마, 임무는 게을리 하면서 색이나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소자가 어찌… 대대손손 천하를 다스릴 본가를 위하여 혼신의 기력을 다 쏟고 있습니다."
"흠흠! 그으래? 그렇다면 좋다. 젊어서 색을 너무 밝히면 요절할 수도 있기에 자제하라는 것이다. 알겠지?"
"예! 소자, 아버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철기린은 위기일발이었다는 생각에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만일 한참 사라와 유라를 능욕하던 중에 부친이 당도하였다면 박살이 나도 보통 박살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철룡화존 역시 색을 밝히기는 하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그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품지 않았다. 그것은 세인들의 눈길에서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 장소가 아니면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명색이 천하의 정의를 부르짖는 무림천자성의 성주이다. 동시에 전 무림을 지배하는 무신(武神)이었다.
그런 자신이 다른 사내들과 같이 생각되는 것을 극히 혐오하였다. 하여 욕정 때문에 여인을 품었다가 세인들의 입 방정에 오르내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부친인 화롱천신이 과거에 당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참 재미를 보던 중 전각의 벽이 무너져 내렸기에 만인환시 중에 허겁지겁 하의를 끌어올렸다는 말은 지금도 무림인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개 소리였다.
그렇기에 자식들에게 말하길 색을 즐기고 싶으면 세인들의 이목(耳目)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만 즐기라 하였다. 철룡화존은 정말 무림의 신(神)이 되어 군림하고 싶었던 것이다.
철기린은 무림천자성 총단을 떠날 때 부친과 한 가지 약속을 한 바 있었다. 여인을 품되 절대 기원과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는 품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었다. 신의 아들이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세인들의 이목을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는 무천장에서는 가능하다 하였다.
철룡화존이 싫어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명령이 즉각적으로 이행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식언(食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오래 전 작고한 화롱철신에게는 심복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철룡화존은 그를 숙부라 부르며 무공을 배웠다. 성주가 된 이후 그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상장로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 그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별일도 아닌 사소한 것이었다. 문제는 무림천자성의 모든 수뇌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의미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토록 식언하는 것을 혐오하였던 것이다.
이후 아무도 거짓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오마분시(五馬分屍) 형(刑)에 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와 유라의 청백을 유린하려던 이곳은 분명 무천장이 아니다. 그렇기에 발각되었다면 치도곤을 당하는 것은 물론 경쟁자로 생각하는 무언공자에게 소성주 직을 빼앗길 뻔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놀라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 철기린을 본 철룡화존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원의 전각 내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나저나 이 집의 천지차가 일품이라고 하더구나. 자, 안으로 들자. 흠흠!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냐? 흐음! 이건 분명 지분 냄새인데…? 설마… 너?"
"아, 아버님! 지분 냄새라니요? 무슨 지분… 아, 이 냄새요? 조금 전에 객잔의 시비가 왔다가 갔습니다."
철기린은 부친이 유난히도 냄새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기에 우기려다가 말을 바꿨다. 만일 끝까지 부인하였다가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감 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으래…?"
"예! 무엇들 하느냐? 어서 천지차를 대령하도록 해라!"
철기린은 화제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 아냐! 마음이 변했다. 천지차 대신 오랜만에 무이산(武夷山) 대홍포차(大紅袍茶)를 맛보고 싶다. 그걸로 가져오도록!"
"예에? 무, 무인산 대홍포차요? 그런 차도 있었나요?"
"하하! 녀석, 그것도 몰라? 무이산 대홍포차란…"
빙그레 미소지은 철룡화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식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때마다 습관처럼 그의 입가에 어리는 흡족하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무이산 대홍포차에는 전설이 얽혀 있었다.
오랜 전, 한 서생이 과거를 치르기 위하여 무이산을 지나다가 병이 생겨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 근처를 지내던 승려가 그를 발견하여 절로 옮겼다. 그리곤 원숭이로 하여금 절벽에 있는 차를 따오게 하였다.
그것을 달여 먹은 서생은 병이 완치되어 무사히 과거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장원 급제한 서생은 부마로 책봉되는 행운을 얻었다. 신세를 진 그는 은혜를 갚고자 승려를 찾아가 절을 새롭게 단장해 주었다.
어느 날 왕비가 병이 생겨 명의를 불러 치료케 하였으나 아무런 차도도 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만 하였다. 이를 본 부마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승려를 찾아가 차를 부탁하였다.
이것을 마신 왕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이에 왕은 자신의 홍포를 벗어 나무 위에 덮어 주었다고 한다.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는 없는 법!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걸친 차나무는 점점 말라붙었다. 이 사실을 안 부마가 홍포를 걷자 오색찬란한 빛이 생기고 차나무는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무이산 대홍포차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약리 작용을 하기에 엄청나게 비쌌다. 천품으로 칭해지는 천지차가 한 잔에 은자 이십 냥인 반면, 이것은 이백 냥이 넘었다. 그나마 수확된 거의 대부분이 황궁으로 진상되므로 은자가 있어도 맛보지 못하기에 부르는 것이 값이다.
은자 닷 냥이면 한 가족이 한 달 동안 살 수 있는 거금이다. 따라서 차 한잔에 이백 냥이나 하니 웬만한 재력가는 마셔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하를 열 번 사고도 남을 재물을 지닌 철룡화존은 예외이다. 따라서 한동안은 물 대신 대홍포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하하! 녀석 알았느냐?"
"예에…!"
철기린은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을 밝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부친은 세상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일 것이다.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기린 역시 대홍포차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철룡화존처럼 아주 자세히는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 역시 여러 번 마셔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한 것은 부친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만은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가도 무언가를 가르치고 나면 까맣게 잊곤 하였다. 하여 화제를 돌리려 일부러 그런 것이다.
한편 대홍포차에 대한 설명을 마친 철룡화존의 부드러운 표정 안에는 아주 미세한 냉소가 어려 있었다.
'흥! 녀석, 내가 모를 줄 알고? 흠흠! 지분 냄새가 두 가지인 것으로 미루어 두 계집을 데리고 있었군. 흐음! 이 녀석을 어쩌지? 그냥 두었다가는 요절하기 십상일 것이고… 흐음! 한동안 여색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혼 좀 내 줘야 할 터인데…'
천하는 아무나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수 없이 많은 도전에 직면하였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철룡화존은 자식들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내심을 감추었다.
게다가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 눈빛 하나만은 상당히 강렬하였다. 그것은 그가 고수여서가 아니었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을 때에도 누구든 그의 앞에서는 이실직고하기 마련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두려움이 바로 수하들에게 충성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이며, 그것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생각한 철기린은 사라와 유라를 놓아준 것이 아까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호천대원으로 하여금 잡아두게 할 것을 하는 생각을 품은 것이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다면 어디다 숨겨 둘 것을… 흐음! 제법 쓸 만했는데 아이고, 아까워라. 제기랄!'
찻잔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부자지간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잡담]
핫핫! 안녕하십니까?
"전사의 후예"를 쓰고 있는 제갈천입니다.
밝아올 새해부터는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게 뭔지 아십니까?
아마 앞 부분을 안 본 무협소설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학창시절 제 짝궁은 무협소설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그걸 보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할 정도였지요.
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물었더니 보면 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권만 줘보라고 하니까 3 편을 주더군요.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렀는지, 누가 누군지, 뭐가 뭔지 전후 인과 관계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재미있었다면 아마 이상했을 겁니다.
대체 왜 이런 걸 보는지 모르겠다고 집어 던졌지요. 그리고는 일년이 넘도록 무협소설은 손에도 안 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심심하여 무협소설을 집어 들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 날 제가 있게 되었답니다.*^^*
아직 앞 부분을 안 보신 분들은 앞에서부터 천천히, 그러면서 꼼꼼히 읽어 주십시오.
보시는 분들은 별게 아닌 것 같아도 글을 쓰는 저는 자구하나, 토씨하나까지 정말 신경 써서 썼답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앞 부분을 안 읽으셨다면 정말 재미없는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꼭 앞에서부터 읽어 주십시오.^^;;
메인화면 좌측 중간쯤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리즈"를 보시면 밑에서 5번째에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걸 클릭하시면 앞에서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문화면" 좌측 연재란에서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를 클릭하셔도 보실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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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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