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허허허! 정아야, 이젠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사부님! 어찌 그런 말씀을…? 제자는 아직 배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주세요."
"허허! 녀석, 이제 다 컸구나. 겸양지덕도 알고… 아무튼 기특하구나. 흐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이제 탕약에 대한 것은 더 가르칠 것이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침구(鍼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부술(剖術)까지 배워야 할 것이야."
"…….!"
장일정은 북의의 말에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껏 사부는 부술이나 침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구와 부술에 대한 언급을 하자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녀석… 이상하다는 표정 짓지 마라. 노부는 침구와 부술에 대해선 모른다. 그나저나 전에 너를 구해주었다는 심마니를 기억하느냐?"
"그, 그야… 기억하고 있습니다."
"녀석! 너는 그가 누군지 모르지?"
"제자가 알기론 약초를 캐는 심마니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 녀석, 노부가 강호에 있을 땐 북의라 불렸다. 노부에게
는 사제와 사매가 있지. 사제는 호문경이라고 하는데…"
북의는 회한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만일 내기에서 지지 않았다면 사매와 일생을 함께 하였을 것이
다. 그랬다면 북의라는 명성을 얻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곤륜산
을 떠나 강호로 흘러들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곤륜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배에서 나온 자식들의 재롱
을 보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북의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 그리고 제자들까지 모두 비명횡사하였기에 이런 생각을 여
러 번 하였다. 그때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의 설명을 들은 장일정은 그제야 사부가 왜 아무런 이유
도 없이 때때로 침울한 표정을 짓곤 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듣고 나니 얼마나 괴로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럴 땐 어설픈 위로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사부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얼마 전, 사부는 보름간이나 자리를 비웠었다. 그리곤 어제 저
녁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너무도 피곤하다면서 깊은 잠에 취해
있다 깨어난 것은 불과 한 시진 전이었다.
깨어난 이후에는 장일정이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는 차 한잔을 마신 이후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하
였으니 오랜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보름간 북의는 오래 전 장일정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심
마니를 찾아 나섰다. 불과 사흘 거리이건만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체하였는지라 바람에 보름이나 걸린 것이다. 예상대로 그 심마
니는 사제인 호문경이었다.
나이 이십에 헤어진 사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해 있
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열다섯 가량 된 여아 하나가 있었다. 그
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사매는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적지 않게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초
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출현을 기다린 것만도 만 아흐레였다. 하
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매인 월궁옥녀 옥란희는 보이지 않았다.
사부인 곤륜신의 역시 아직 살아 있을 나이였다. 하지만 그 역
시 보이지 않자 무언가 사연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제인 남의에게 달려가 어찌된 영문이냐
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 간 그가 너무도 괘씸하여 얼
굴을 마주치기조차 싫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
런 강산이 네 번은 변할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 마음 속에 앙금
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서 온
것이다.
"이걸 가지고 그에게 가 보거라. 이걸 보여주고 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아마 가르쳐 줄 것이다."
장일정은 사부가 내미는 옥잠(玉簪)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누구의 솜씨인지 모르나 정교한 솜씨로 새겨진 봉황 한 쌍이
있었는데 눈이 있는 부위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
마도 보석 가운데 가장 진귀하다는 금강석인 모양이었다. 사내들
이 사용하는 것보다는 가는 대신 끝 부분이 부드럽게 처리된 그
것은 여인들이나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사부님! 이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즉시 하산토록 해라. 알았지? 침구
와 부술을 모두 배우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사부님…!"
"만일 의술을 모두 익히기 전에 돌아온다면 그때부터 너는 노
부의 제자가 아니다. 알겠느냐?"
"사, 사부님…!"
엄한 표정을 짓는 사부를 본 장일정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잘못한 일이 있을 때면 사정없이 회초리를 내리치던 사부였다.
현재 사부는 그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느냐? 여긴 네 물건이 없다. 그러니 어서 비호를 타고
가거라. 가거든 그의 모든 것을 배워와야 한다. 알았지?"
"사, 사부님…!"
"어서 가거라."
말을 마친 북의는 냉정하게 돌아앉았다. 장일정은 한참을 머뭇
거리다가 말없이 일어서서 천천히 대례를 올렸다. 이것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길고 긴 이별의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그의 모든 것을 배워와야 한다. 알겠지?"
대흥안령산맥의 능선을 타고 가는 장일정은 아직도 귓전을 울
리는 사부의 창노한 음성에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보름간의 외
출에서 돌아온 사부는 전과 달리 급작스럽게 노쇠한 듯한 느낌
이었다.
얼마 전부터는 눈이 침침하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어
떤 때에는 음식에 작은 돌도 들어 있기도 하였다. 하여 요즘에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장일정의 몫이었다. 그런데 사부를 홀로 남
겨두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은 것이다.
"흑! 사부님의 말씀대로 사숙의 모든 것을 배울게요. 대신 몸
건강히 계셔야 해요. 아셨죠? 호아야, 어서 가자! 어서 가!"
장일정은 어쩌면 굶을지도 모르는 사부를 두고 떠나려니 눈물
이 솟으려 하자 말고삐를 가볍게 흔들어 비호로 하여금 빨리 가
게 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부가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부의 마음도 몹시 아플 것이다.
일가친척 모두가 비명횡사한 후 얻었던 손녀는 낭군을 만나
떠난 후 한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종종 섭섭하다는 표
현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여인은 출가를 하면 외인이 되는 것이
라면서 애써 씁쓸한 기분을 다스리곤 하던 사부였다.
이후 정을 준 사람이라곤 자신 밖에 없다. 아마도 사부는 친손
자를 멀고 먼 유랑의 길로 떠나 보내는 기분일 것이다.
장일정은 만 하루 동안이나 가슴 답답함을 느끼며 이동하였다.
다시 하루 동안은 이제 새로 만날 사숙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몇 년이 지났네. 잘 계실까?"
열두 살 철없는 나이 때 비호를 훈련시키겠다면서 겁도 없이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사왕곡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옛일을 생각하자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사
숙과 사숙의 손녀는 참으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특히 호옥접
(胡玉蝶)이라는 계집애를 떠올리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며칠 동안 머물렀지만 떠나려 할 때 눈물을 찍어내던 것
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도 싶은 산중에 살고 있기에 같은 또래
와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없기에 무척이나 정(情)에 굶주렸던 모
양이었다.
"하하하! 그 동안 별래무양 하셨는지요?"
"아니! 이게 누군가? 허허! 오랜만일세. 그 동안 많이 자랐군."
남의 호문경은 정중하게 대례를 올리는 장일정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 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
로 성장하기는 하였지만 숯검댕이처럼 시커멓던 눈썹과 반듯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던 그를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타고 온 비호 때문이었다. 잡털이라곤 하
나도 섞이지 않은 백마는 흔치 않다. 게다가 비호는 한 눈에 보
기에도 천리준구였다.
이런 말이 흔할 리는 더더욱 없는 법이다. 하여 오래 전 독사
에게 물려 신음하던 소년의 말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볼 수 있었
던 것이다.
한편 호문경의 뒤에는 수줍은 표정과 아울러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방년 십오 세가 된 호옥접이었다. 열
두 살 때에는 그저 평범한 말라깽이 소녀였던 그녀는 그 동안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키도 한 자 가까이 자라 있었고, 성숙한 처녀티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허리 아래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나눈 후 정갈
하게 묶은 그녀는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는 경장을 걸치고 있었
다.
아직 풍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
은 적당히 들어간 그런 몸매였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반갑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하! 잘 있었어?"
"그, 그래…! 너, 너는…?"
"나야 잘 있었지. 너,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구나. 그런데 왜 이
렇게 예뻐졌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그, 그래…?"
대례를 마치고 일어선 장일정은 예전처럼 안부를 물었다. 그러
자 호옥접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면서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
리곤 이내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왠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두 볼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녀석들…"
둘을 바라보던 남의는 너털웃음과 함께 아무런 탈 없이 이만
큼 자란 것이 흐뭇하면서도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 먼 곳까지 웬일이냐? 일전에 볼일이 있어 가다보니
태극목장이 텅 비어 있더구나. 어디로 옮긴 것이냐?"
"아니에요. 흐흑! 태극목장은 이제 없어졌어요."
장일정은 태극목장에 일어났던 참사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친과 모친의 비명횡사를 생각을 할 때면 눈물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이런…! 쯧쯧쯧! 몹쓸 늑대들이로구나."
"……!"
호옥접은 너무도 참담한 이야기에 아미(娥眉)를 찡그리고 있었
다. 사람이 늑대의 먹이가 되었다는데 어찌 괜찮겠는가!
"쯧쯧쯧…!"
남의는 안타깝다는 듯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잠시 후 눈물을
닦은 장일정은 생각났다는 듯 품에 있던 옥잠을 꺼내 들었다.
"앗! 아니? 이건…? 이거 대체 어디에서 났느냐?"
옥잠을 보자마자 남의의 표정은 돌변하였다. 장일정이 꺼내든
옥잠을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남의가 곤륜산을 내려와 혼탁한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따지고 보면 생사잠(生死簪)이라 부르는 이것 때문이었다. 그렇
기에 한눈에 알라보며 경악성을 토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메인화면 좌측에 자리한 "오마이뉴스 시리즈"에서도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를 감상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
다.(회색바탕)
일일이 찾아다니시던 불편을 덜어드리게 되어 매우 기쁘군요.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설날인데 떡국은 드셨나요?
핫핫!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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