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 민박집의 침실 모습김남희
아주머니의 이름은 백00. 올해 나이 쉰넷. 고향은 중국 흑룡강성의 목단강. 해방 무렵 함경북도에서 건너온 가난한 집안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 시대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머니 역시 가난 때문에 학업이 늦어졌고,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터진 문화혁명으로 인해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흑룡강으로 휴가를 나온 군인을 소개로 만나 연변으로 시집을 갔다.
"내 시집갈 때 뭣도 모르고 갔지. 그때 우리 집이 하도 곤란해서 한 입이라도 덜어야 할 형편이었거든."
시집이라고 와보니 시집 역시 가난한 살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식구까지 많아 거두어야 할 입은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 다섯의 시동생들과 삼촌까지 열 둘이나 되었다. 밥상을 차리면 시조부님은 안방에서, 시부모님은 정지간에서, 아낙들은 부뚜막 옆에서 밥을 먹던 시절. 어른들 밥상 수발하랴, 어린 것들 밥 먹이랴, 밥 숟가락 한 번 편하게 뜰 수 없는 고된 시집살이였다. 맏며느리로써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키우는 동안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마저 중풍에 걸려 앓아 눕는 일이 생기고 만다.
@ADTOP3@
"풍이라는 게 들기는 헐해도 한번 들면 떼기는 오죽 바빠?(힘들어?) 내 시어머니 똥, 오줌을 3년 내리 받아냈지."
결국 늘어만 가는 빚을 감당 못해 아주머니는 북한으로, 베트남으로, 소련으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중국에서 양말이며 옷가지, 선풍기 따위를 떼어다가 팔아 번 돈을 연변으로 부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낸 지 몇 년. 아주머니는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들을 연이어 겪는다. 장가도 안 간 이십 대의 큰아들이 사고로 죽고,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데 이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내가 썩어지게 고생하면서 살림을 꾸렸는데 이 인간이 바람을 피우다니….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었지. 자식까지 먼저 보낸 모진 년이 뭘 더 못하랴 싶어 내 이혼했어. 내 인생을 돌아보니 단 한 순간도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는 거야. 이제 내가 못 먹고 없이 살아도 마음이나 한번 편하게 살자 싶어서 헤어졌지."
남편과 헤어진 후에도 아주머니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북경으로 건너온 지 이제 2년. 북경으로 파견 나온 한국인 가정에서의 보모 일을 거쳐 지난 12월, 매달 5000원(한화 75만원)의 월세를 내며 시작한 민박집은 아직 적자이다. 세 개의 방에 손님이 다 차지 않아도 아주머니는 항상 마루의 소파에서 주무신다.
"하나도 안 불편해. 내 이집 들어오고 나서 내리 여기서 잤는 걸. 손님이라도 있는 날에는 너무 기분이 좋지. 손님들하고 얘기도 하고, 밥상 차리고 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거든. 내가 원래 노는 걸 좋아해. 근데 여기 와서는 놀러 갈 데도 없고, 남편한테 배신당한 년이 뭐 좋다고 놀러 다니나 싶기도 하고, 또 전화도 받아야 하니까 꼼짝 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