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과 죽음, 그 사이에 자리한 욕망

책 속의 노년(53) : 〈산소리〉

등록 2003.02.05 16:53수정 2003.02.0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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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의 적응 유형을 보통 성숙형, 무장방어형, 은둔형, 분노형, 자학형 등으로 구분하는데, 성숙형과 방어형, 은둔형은 노년 생활에 비교적 잘 적응하지만 분노형과 자학형의 특성을 지닌 사람은 노년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늙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 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불행한 시대와 사회, 부모, 형제 등에게로 돌리면서 남을 질책하는 유형이 분노형이라면, 자학형은 지나온 삶에 대한 많은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면서 불행과 실패의 원인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유형이다.

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꿈과 목표가 있는 법, 그 누가 자신이 계획하고 꿈꿔온 일을 모두 다 이루고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그래서 노년의 삶이란 스스로 그런대로 최선을 다했고 이만하면 만족스럽다는 점수를 매기면서도, 때로 분노하고 때로 자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산소리〉의 주인공 오가타 싱고는 62세의 노인이다. 아직 은퇴하지 않고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면서 한 살 연상인 아내 야스코와 아들 슈이치, 며느리 기쿠코와 함께 살고 있고, 딸 후사코는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한 가정 생활로 인해 두 딸을 데리고 친정에 와있다.

겉으로 보면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싱고는 '머리가 텅 빈 듯한 초조함'을 느끼며 내면에서 자신의 나이들어감, 죽음과의 멀지 않은 거리, 아직 살아있는 욕망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살고 있다.

어린 시절 오래도록 사모한 연상의 여인, 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싱고에게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 여인은 결혼 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아내 야스코는 바로 그 여인의 동생이다. 그런데 싱고는 며느리 기쿠코에게서 그 여인을 느낀다. 기쿠코는 다정한 시아버지를 잘 따른다.

시아버지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을 며느리 기쿠코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기쿠코의 입에서 당돌한 표현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소설은 우리의 상식과 일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며 흘러간다.

아들 슈이치는 아내 기쿠코가 아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이를 지켜보는 싱고의 가슴 속은 복잡하다. 또한 마약중독자가 된 사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딸 후사코를 보는 마음도 결코 편안하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해소되지 않은 싱고의 욕망은 여러 번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러면서도 싱고는 그 은밀한 욕망의 반대편에서 '임종을 알리는 소리'라고 하는 땅울림과도 같은 "산(山)소리"를 듣는다. "산소리"에 대한 공포는 망각과 상실에 대한 공포와 다르지 않다. 늙음과 죽음이란 어쩜 욕망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장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곳으로 내려가 보면 그 뿌리가 얽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모하던 연상의 여인의 이른 죽음과 그 동생과의 결혼, 싱고의 해소되지 못한 욕망과 이루지 못한 꿈은 결국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며느리 기쿠코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느끼는 나이에도 여전히 욕망은 살아 숨쉬며 꿈과 현실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다.


싱고의 일상과 꿈, 과거, 현재를 공유하고 있는 가족 관계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소설은 독특한 맛과 향기를 가지고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끌어당기는 욕망과 은밀한 꿈은 노년에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며느리에게 기묘한 애정을 느끼는 시아버지 이야기로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산소리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출판, 1995)

덧붙이는 글 (산소리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출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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