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참여한 소록도 봉사

소록도에서 이 · 미용봉사를 마치고

등록 2003.02.07 03:02수정 2003.02.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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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27일(월) 새벽은 때 아닌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작년 1월 소록도 미용봉사 갔다 오는 길은 갑자기 많은 눈이 내려 빙판길에 어찌나 놀랬던지, 이번 겨울 봉사는 예산도 부족하고 해서 하지 않는 걸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설 안에 가서 개운하게 예쁜 머리를 해 드리고 싶었다. 또한, 새해 첫 달을 봉사로 시작하고 싶다는 봉사자들의 생각을 한데 모아 일정을 정하고 준비를 하면서도 추워도 되지만 제발 눈만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밤부터는 전국적으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많은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는 다소 걱정된 마음으로 감속 운행을 하면서 출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소사모(소록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http://cafe.daum.net/ilovesosamo) 미용 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강숙희 회원이 "오늘은 인원이 적어서 방문봉사는 엄두도 못 내고 지정된 장소에 오신 분들만 머리 손질을 해 드릴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일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서로 협조를 당부했다.

봉사 때마다 참여한 60대의 한 봉사자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봉사 다니기가 힘든데 소록도만은 사랑 때문에 이렇게 새벽길을 달려왔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요즘 안 바쁜 사람이 누가 있으랴!

석 달에 한번씩 가는 일이 금방 돌아오지만 순전히 사랑 때문에 모두가 참여한 것이었다.

소록도에 도착하니 새마을 회관에서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중앙리에 있는 주민후생복지관에서 미용봉사를 해 왔었는데, 그곳에서는 따뜻한 물을 난로에 찜통을 얹어 데워서 마련하니 겨우겨우 머리를 감겨 드려야 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 새마을 부락회관으로 정했다고 주민자치회 회장님이 말씀을 하셨다.


제6차 소록도 주민 이 · 미용봉사의 모습
제6차 소록도 주민 이 · 미용봉사의 모습고달령
새마을 회관에는 50여명의 주민들이 대부분 퍼머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여섯번째 주민들의 만남은 너무나 친해져서인지 고향 어르신 뵌 기분이었다.


"안녕하셨어요" 라는 인사는 어느새 사라지고 "나오셨어요"로 변해가고 있었다.

새마을 부락은 주민들의 숙소와 공동세면장 회관 등 모든 생활시설이 한 건물 안에 있다. 시력을 잃으신 분들이 워낙 많이 사신 곳이라 계단이 없는 아주 오래된 작은 병원이었다.

한 주민이 "미용봉사에 오니 소록도 사람 다 만난 것 같네요. 너무 꼼꼼하게 하지 말고 덜 기다리게 대충대충 좀 하시오. 장날 같습니다" 하면서 웃으셨다.

소록도 주민들은 대부분 허약하신 분들이라 퍼머 약품은 가장 순하고 향이 좋은 걸로 준비를 했었다.

어떤 봉사자는 한 할아버지께 어찌나 정성을 들이던지 마치 친정아버지나 시아버지 외출하실 때 단장 시켜드리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모든 생각을 집중시키고 최선을 다해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번에는 새마을 부락에 배정된 3명의 자원봉사자가 작업을 도왔다. 한 달 여정으로 와서 3주째 보내고 있다는 그들은 광주에 산다는 것 외에는 이름 밝히기도 꺼려 했었는데, 휠체어와 외부의 도움 없이는 문 밖 출입이 어려운 분들을 한분 한분 모시고 오고, 또 모셔다 드리고 16명의 인원으로는 부족한 일손을 틈나는대로 도와주면서 온종일 땀을 흘리며 달려 다니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을 했다.

모자를 쓰신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차례가 훨씬 지났는데도 그냥 앉아만 계셨다.

그분은 75세로 동생리에 사는 주민이었는데 갑자기 "제가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봉사왔으니 환영가를 연주하고 싶다"면서 속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셨다.

무대와 정교한 객석은 없었지만 작업을 하면서 듣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경쾌함으로 시작된 연주는 세 번째 곡부터는 한을 풀어내는 듯한 구슬픈 가락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처음과 끝부분, 중간 중간 떨림의 기교표현은 여러 악기로 연주되는 합주곡 같은 정말 들어보기 힘든 훌륭한 연주였다.

그분은 동생리 작은 언덕에서 앞을 볼 수 없는 외로운 나날들을 하모니카를 불면서 한 평생 살아 오셨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명연주였지만 가슴 한켠이 져며왔다.

연주가 끝나고 찬송가와 우리가곡을 준비해서 들려드렸다.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꽃, 추억은 아름다와 밉도록 아름다와,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

퍼머를 하신 분들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멀리 사신분들이 끝나고 집에 가시는 길은 이번 봉사에 제공한 광주중앙교회 버스가 담당을 했다.

"몇분 후에 남생리와 동생리 방향으로 운행합니다. 그 다음에는 중앙리 방향으로 운행됩니다" 안내 말씀을 드려 안심하고 기다리시도록 했다.

분주한 하루가 끝나 갈 무렵 신생리에 사는 한 주민이 오셨다. 보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기운을 못차리고 있었는데 집행부 임원이 찾아가 집에만 계시지 말고 밖에 나가자고 하면서 모셔 왔던 것이다. 돌아가신 그 할아버지는 2년 전 고향방문 행사 때 거제도 고향 마을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저기가 내가 살았던 곳이네, 저기 산도 그대로 있고,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고향땅 밟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지난 여름 봉사 때 모시옷을 곱게 입으시고 나오셔서 하루종일 앉아 계셨는데, 이제 그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지난 연말 285명의 소록도 주민들에게 카드를 보낼 때 몇 줄의 편지를 써서 카드 말미에 붙여 보냈다. 그 카드를 그의 부인은 입원중인 할아버지께 가져가 환자가 잘 보이는 벽에 붙여 놓고 "여기 해가 떠오르고 학이 있지 않소? 소사모에서 보낸 편지도 있고요. 힘을 내세요" 말씀을 드렸는데 그 편지만 늘 읽으셨다고 힘없이 말씀을 하셨다.

카드작업을 하다보니 후원 회원들에게 보낸 새해 인사말 같아 그냥 서운해서 첨부한 조각편지를 그토록 가슴속에 간직하시다 눈을 감으셨다고 생각하니, 생전의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 무슨말로 위로해 드려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소록도 주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희 소사모에서 주최한 고향 방문과 이·미용봉사에 참가해 주셨던 일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습니다. 계미년 새해는 모든 이들이 살맛 나는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번에 130여 주민들에게 커트와 퍼머를 해 드리고 눈보라가 치고 있어서 예정보다 1시간 빨리 출발을 했다. 해가 지기 전에 고흥지역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파도가 사납게 출렁이는 녹동 앞 바다를 건너와, 광주로 돌아오는 길은 내리막길이 많고 차량통행이 적은 화순쪽 보다는 멀더라도 순천쪽으로 차를 달렸다. 곡성을 지나 담양쯤 왔을 때 본격적인 빙판길이 시작되었고, 그날 밤 많은 지역이 대설주의보와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겨울봉사는 한마디로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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