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옥으로서는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위 뒤의 나무가 원래부터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과 창이 바위를 찌르는 듯한 시늉을 할 때 누군가의 지풍이 은밀히 발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와 짜고 벌인 일이었다.
무림은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의 철칙으로 지탱되는 곳이다. 그것은 정의수호대라 하여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림의 철칙을 더욱 숭상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정의수호대원이라 할지라도 무공의 고하를 따져 은근히 서열을 매기기 때문이었다.
창법을 시전한 자는 정의수호대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자였다. 그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산해관에 배치된 것이 못마땅하였다. 자신의 무공 정도면 중원 복판에 자리잡은 비교적 유서 깊은 무천장에 배치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다른 정의수호대원들의 무공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자칫 잘못하면 무시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다른 정의수호대원의 무공이 어쩌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다른 대원들의 수발이나 드는 처지가 될 것이라 판단한 그는 다른 대원 하나를 매수하였다. 그는 산해관 제일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춘화원(春花院)의 기녀 하나를 기적(妓籍)에서 빼야하는데 은자가 없어 쩔쩔매던 자였다. 그가 머리를 올려준 기녀가 회임을 하였던 것이다.
은자 삼천 냥짜리 전표가 건네졌고, 그래서 창이 바위에 다가가는 순간 은밀한 각도에서 지풍이 발출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대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설마 짜고 이러한 짓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회옥은 며칠 동안이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모습에 밤잠을 설쳤다. 그러다가 매달 왕구명의 급료를 받으러 무천장에 가느라 알게 된 수문위사에게 내공이 무어냐고 물은 바가 있었다.
그는 알고 있는 범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내공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공을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림 문파에 제자가 되면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회옥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공은 어릴 때부터 익히는 것이 좋기에 대부분의 문파들은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 가운데 무공에 재능이 있다 판단되는 아이들만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무천장 같은 곳에서도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이미 내공을 익히고 있거나 다른 무예를 출중하게 시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경우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미 열다섯 살이 된 이회옥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을 터이니 괜한 애를 쓰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하라 하였던 것이다. 하여 낙심천만한 이회옥은 혹시 독학으로라도 내공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싶어 청룡무관의 서실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곳에 내공심법에 대하여 기록된 서책은 없었다.
청룡무관에 내공을 익힐 수 있는 서책이 있기는 있었었다. 그것은 바로 청룡검급이다. 하지만 그것은 왕구명이 지닌 채 떠났기에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공을 익힐 수 있을까를 여러 번 생각했었다. 그러던 차에 무공을 가르쳐준다니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저, 정말 무공을 가르쳐주실 거예요?"
"크크!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뭘… 대신 열심히 배워야 한다. 요령 피우면 머리가 이따만해지도록 팰 거야. 알겠지?"
냉혈살마가 팔을 벌려 과장된 몸짓을 하였음에도 이회옥은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에 겨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열심히 배울게요."
"크크! 좋았어. 그렇다면 본좌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자, 이걸 받아라!"
얼떨결에 비접나한이 건넨 한 권의 서책을 받은 이회옥은 희미한 빛 사이로 표지에 적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 천하제일(天下第一) 여의신공(如意神功) >
'으앗! 처, 천하제일 여의신공? 그럼, 무엇이든 마음대로…?'
이회옥은 표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 내심 환호작약하였다. 여의(如意)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당연히 천하제일신공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크흐흐! 그것만 있으면 세상은 네 마음대로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다. 허나, 나처럼 하면 패가망신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나 같이 안 되는지를 가르쳐주지."
천하제일 색한인 비접나한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가 건넨 여의신공이란 비급은 한 마디로 방중술서였다. 그러나 단순히 방중술(房中術)에 대한 것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의독심법(如意讀心法)과 여의안면변형술(如意顔面變形術) 등이 그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추측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심(女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헤헤거리며 웃다가도 토라지기 일쑤이고, 대성통곡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헤헤거리는 사람이 바로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반은 여인이다. 나머지 반은 물론 사내들이다. 사내들은 자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알고 큰소리를 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모친이나 내자, 심지어는 여식에 의하여 중대한 결정을 접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여심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천하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하여 그런 여심을 읽을 수 있는 독심법이 있는 것이다.
비접나한이 천하제일 색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외모가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실상은 뛰어난 언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간 순간 변화하는 여심을 정확히 읽을 수만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말로서 여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접나한에게 청백을 잃은 여인들 대부분은 스스로 의복을 벗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여 청백을 빼앗긴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삼백여 여인들은 여의독심법이 완전해지기 전에 만났던 여인들이었다. 그것이 완전해진 이후에는 웬만한 여인들은 자신이 청백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의안면변형술이 만들어진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청백을 잃은 여인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칫 추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뜻대로 안면 근육을 움직여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성과가 있었다. 여인들이란 추하고 늙은 사내보다는 젊고 잘 생긴 사내들을 원한다. 나이가 들면 이러한 점이 약간 줄어들기는 하다.
사람 됨됨이나 지닌 바 재산, 그리고 학식까지 살필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여인들 절대 다수는 사내가 그저 임풍옥수(臨風玉樹)같은 외모만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저 잘 생기기만 하면 타고난 품성이 어떻든 불학무식이든 말든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젊고 잘 생긴 청년이 접근하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마음은 물론 몸까지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비접나한은 욕심을 마음껏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정의수호대에 생포된 것은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던 본래 외모 때문이었다. 여의안면변형술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비접나한은 본래의 얼굴로 여러 여인의 청백을 빼앗았다.
그래서 천하 각지에는 비접나한의 거처를 알려주거나 생포한 자에게는 적지 않은 은자를 지급하겠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어느 날, 질펀한 운우지락을 나눈 끝에 깊은 잠에 취해 있던 그는 완전히 방심하는 바람에 본래의 모습으로 있었다. 그런데 그날 청백을 바친 여인은 공교롭게도 비접나한에게 청백을 잃고 스스로 목을 맨 여인의 조카였다. 그래서 생포된 것이었다.
"네게 무공을 가르쳐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냉혈살마의 말에 즉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떠올린 이회옥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조, 조건이요?"
"그렇다. 무공이란 사제지간이 아니면 전수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의당 구배지례(九拜之禮)를 갖춰야 할 것이나, 노부는 그런 것까지는 요구하지 않겠다."
"……?"
이회옥은 굳이 제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인마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떠올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의 평생 심득(心得)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을 공짜로 가르쳐줄 수는 없는 법! 네가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한다면 노부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지."
"그, 그게 뭔데요?"
이회옥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냉혈살마가 대체 어떤 조건을 걸지 몹시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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