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높고 물 맑은 안흥 초등학교

어린 날의 기억을 찾아가는 길 (2)

등록 2003.02.11 19:47수정 2003.02.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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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에서 바라본 안흥초등학교 모습
교문에서 바라본 안흥초등학교 모습최성수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 쪽으로 난 교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시커먼 판자를 곁대어 만든 일층짜리 나직한 건물이 우리를 반기곤 했다. 1960 년대의 초반, 내가 다닌 안흥 초등학교는 이 마을 저 골짜기에서 모여든 아이들로 넘쳐나는, 그래서 제법 시끌벅적하기까지 한 시골 학교였다.


한 학년이 둘 혹은 세 반, 한 반은 육십 여 명이 되던 안흥 초등학교. 시장터에서 온 아이들과 지구리에서 온 친구들과 상안리 골짜기에서 모인 동무들이 어울려 다닌 그 학교를 떠올리면 지금도 십리 가까운 등굣길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학교 정원에 소담스레 내려앉은 눈
학교 정원에 소담스레 내려앉은 눈최성수
상안리에 살던 우리는 비포장의 장터로 이어지던 그 길을 따라 책보를 어깨에 둘러메고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등교하곤 했다. 아름드리 미루나무들이 늘어서 있던 비포장의 신작로는 이제는 번듯한 포장 도로로 바뀌고 말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먼지 풀풀나는 옛날의 그 길로 남아 있다.

아이들 팔로 한 아름이 넘는 아카시아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던 안흥 초등학교는 당시만 해도 분교를 거느리고 있는 제법 큰 학교였다. 지금은 찐빵으로 이름짜한 안흥리와 상안1리, 지구리 같은 마을의 아이들이 주로 본교인 안흥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안흥면은 강릉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제법 번화했다. 이제는 고속도로가 생겨 휴가철이나 일부러가 아니면 차편이 안흥에 들르지 않지만, 그 당시 서울서 출발한 시외 버스들은 안흥에서 점심을 먹고 강릉 방면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는 몇 장면이 영화처럼 살아난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저학년이었던 나는 수업이 일찍 끝나곤 했는데, 그날 따라 무슨 일이었는지 함께 귀가하던 친구들이 다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되었다. 아마도 당번이었거나 혹은 청소였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십리 가까운 먼 길을 걸어가기가 걱정이 된 나는 오학년이던 누나가 수업이 끝나면 같이 갈 생각으로 누나네 교실 창 아래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검은 판자를 곁대어 지은 그 건물은 그야말로 고색창연, 아니 꼭 그을음이 오랜 세월 동안 헤적여온 부엌의 서까래처럼 까만 것이, 등을 대면 금방이라도 검댕이가 묻어 나올 겉만 같았다.

교문 옆 솔바람 교실(임간교실)
교문 옆 솔바람 교실(임간교실)최성수
나는 그 판자에 기대어 누나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나른하게 내 몸으로 내려쬐고 있었고, 교실 창 너머로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햇살보다도 더 나직하게 내 귀에 들려왔다. 그 바람에 나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그렇게 잠에 빠져 있었을까, 내 머리통 위의 창문에서 우렁우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 왜 여기서 자고 있니?"

선 잠 깬 눈으로 올려다보니, 거기에는 누나네 담임 선생님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누나네 반 학생들 모두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머리만 긁적이고 말았다. 지금은 번듯한 양옥으로 지어진, 그 시절 누나네 교실 자리를 보면 나는 자꾸 해바라기를 하고 졸던 그 날이 떠오른다.

또 학교 창고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이던가, 수업이 끝난 오후, 우연히 창고 곁을 지나다가 문이 열린 것을 보게 되었다. 학교 창고에는 무엇이 보관되어 있을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조금 열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온갖 물품과 함께 거기에는 우리가 배급받는 가루 우유가 포대째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뜯긴 채였다.

나는 배급받던 가루 우유의 그 달착지근하고 비릿하고 고소한 맛을 떠올렸는데, 그러자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나는 얼른 포대를 열고 손으로 우유를 몇 움큼 퍼 입안에 넣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창고를 벗어났는데, 급하게 먹느라 그랬는지 그만 가루 우유가 목구멍을 막아버려 갑작스런 기침이 터져나왔다. 한번 시작한 기침은 좀체 멈출 줄 몰랐고, 나는 입안의 가루 우유를 다 뿜어내며 쪼그리고 앉아 기침을 토해내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려운 마음에 안절부절 해야 했다. 기침이 멈추고 나니 이번엔 입 천정에 가루 우유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때가 꼬질꼬질한 손가락을 넣어 긁어내야 했다. 지금도 가루로 된 유제품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 한 가지 기억은 급식 빵에 대한 것이다. 점심 대신 나누어주던 급식 빵은 제법 큼직해서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삼교시 수업 시간쯤이면 선생님께서는 급식 빵을 손수레에 실어올 사람을 지명하곤 했다. 대개는 당번을 시키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당번과 함께 지원자를 더 뽑기도 했다.

"오늘 빵 실어 올 사람?"

선생님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들은 팔이 찢어져라 치켜올리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저요, 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 중 몇 몇을 지명하여 그날치 급식 빵을 실어오게 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안흥 시장 차부에 리어카를 끌고 가서 그날치 급식 빵을 실어오는 것이 담당자들의 일이었는데, 그 일에 서로 나선 것은 당번을 하면 빵을 하나 더 주기 때문이었다.

속부터 파먹고, 딱딱한 껍질은 제일 나중에 마치 굴처럼 만들어 먹던 그 구수하던 옥수수빵. 나는 지금도 그 빵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가끔 빵집에서 옥수수 빵을 사다 먹곤 한다.

나는 그런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안흥 초등학교를 4년간 다녔다. 오 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된 때문이다. 그래서 정식으로 안흥 초등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서울에서 다닌 초등학교의 기억보다 안흥 초등학교의 기억이 더 생생하다.

서울에서 다닌 초등학교의 교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지금도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안흥은/예로부터 인물이 출중하도다/배우는 무리야 분발하여라/독립의 종소리 우렁차도다"하는 창가조의 안흥 초등학교 교가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는 내 사촌과 일가 친척, 동창의 아이들이 다니는 안흥 초등학교. 그때보다 건물은 더 새 것으로 지어졌지만, 아이들은 더 줄어 한 학년이 한 반, 한 반은 20명도 채 되지 않는, 그래서 전교생이라야 백 여 명 남짓인 기억 속의 그 학교.

솔바람 교실이라 이름 붙여진 임간 교실과, 지금은 학교 앞길이 포장되는 바람에 멋 없이 방음벽이 들어섰지만, 봄이면 조팝나무 꽃 하얗게 피어나던 그 안흥 초등학교를 나는 고향에 갈 때면 가끔 훑어보곤 한다. 퇴비장이 있던 곳에 들어선 자작나무 둘러친 테니스장과 올망졸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교정, 눈이 부시게 넓고 흰 겨울 운동장이 현실의 내 앞에 놓여 있다.

퇴비장이었던 곳 근처에 세워진 자작나무가 아름다운 테니스장
퇴비장이었던 곳 근처에 세워진 자작나무가 아름다운 테니스장최성수
그러나 나는 그 현실의 풍경 속에서 세월이라는 물살에 점점 더 둥글게 모서리를 깎아 온 어린 날의 학교, 내 기억처럼 더 낮아지고 잔잔해 진 그 시골 학교의 나른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늦게 끝나는 누나 기다리다 잠든
판자 곁 대어 만든 담모퉁이
시월의 햇살 아슴푸레 내 잠을 흔들었지
코스모스 핀 신작로
고만고만한 또래 재잘거리며 흩어지던
"산 높고 물 맑은" 안흥초등학교
삼촌 친구인 우리 담임 박선생님
막걸리 한 잔으로 취해 비틀거리던
그 길을 이제 누가 걸어가고 있는지
눈빛 선한 아이들 대개는
공장으로 광산으로 빠져나가고
나 또한 여기 떠나 도회지 빛 바랜 학교에서
그때의 나보다 배도 더 큰 아이들을 가르치다
텅 빈 방학 어린 날의 뜨락에 와 서면
운동장을 휩쓸며 사라지는 회오리바람
수업 감시도 자모회 월례 회의도 없어
가을이면 해바라기 목 늘이고 수업 참관하던,
이제는 햇살만 살쪄 지붕 위로 흘러가는
강원도 첩첩 산골 우리 안흥 국민학교(졸시<안흥국민학교>)


흰 눈이 아이들을 기다리고있는 겨울 방학의 운동장
흰 눈이 아이들을 기다리고있는 겨울 방학의 운동장최성수

덧붙이는 글 | *기사 끝의 시는 발표 당시의 표기법에 따라 현행 표기법인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로 하였습니다.
**시의 인용한 부분은 안흥초등학교 교가의 일부분입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끝의 시는 발표 당시의 표기법에 따라 현행 표기법인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로 하였습니다.
**시의 인용한 부분은 안흥초등학교 교가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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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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