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칼갈이 사영기업가라고”

베이징 뉴졔 골목의 까오 할아버지 이야기

등록 2003.02.15 01:31수정 2003.02.1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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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제 골목길 정육점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 박현숙

“갓 잡은 신선한 소고기 있어요! 소고기 팔아요, 소고기!”
“따끈따끈한 소고기면, 양고기면!”

점심 때가 가까워오자, 뉴졔(牛街) 골목길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골목길 가득 널린 정육점들 앞에는 ‘갓 잡은 신선한 고기’들이 주렁주렁 내걸려 있고, 그것들의 비릿한 살내음이 한참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육점들 사이사이로 들어선 노점식 간이 식당들에서 풍겨 나오는 양고기며 소고기 삶는 국물 냄새가 골목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면서 삼삼오오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길거리 식당에서 새어 나오는 국물 삶는 연기들과 그 국물에 후루룩 국수를 말아먹는 사람들의 더운 입김으로, 한겨울 뉴졔의 매마른 하늘이 차츰 윤기를 띄기 시작하는 즈음도 바로 이 무렵이다.

뉴졔는 베이징에서도 소시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뉴졔에 소시장이 유명했던 것은, 이곳이 바로 베이징의 회족(回族)들이 대대로 모여살았던 집단거주지였기 때문이다. 신장의 위구르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이슬람을 믿는 소수민족들이다.

중국의 닝샤(寧夏)라는 지방이 이들 회족들의 자치구이긴 하지만, 베이징에만도 회족들이 무리를 이루어 사는 동족촌들은 여러곳에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이곳 뉴졔는 베이징의 가장 대표적인 회족 동족촌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베이징에서도 가장 특색있는 소수민족 집단 거주지였다. 허나, 지금은 대부분의 ‘특색’들이 사라지고 현대화된 상업지구로 탈바꿈했다. 베이징에 개발붐이 일어난 후의 일이다. 소시장이 있었다는 골목에 소들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뉴졔 대로 벽화에 그려진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들과 그 맞은편 이슬람 사원이 그나마 이 거리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는 그림들이다. 굳이 한가지를 더 보태자면, 골목길 마다 즐비하게 늘어선 정육점들에는 ‘여전히’ 돼지고기가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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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졔 대로의 소수민족 벽화 ⓒ 박현숙


그렇기는 해도, 점심무렵의 뉴졔는 확실히 여느 후통(胡同, 골목)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정육점들이 늘어선 왁자지껄한 골목도 그렇거니와 하늘위로 모락모락 올라가는 양고기 국물 삶는 연기와 그 냄새는 베이징의 다른 후통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있는’ 풍경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이 변했는데 칼갈이도 투자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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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갈고 있는 까오 할아버지 ⓒ 박현숙

뉴졔 골목길에는 사실 또 한가지 ‘특색’이 있긴 하다. ‘칼갈이 사영기업가’ 까오 할아버지의 칼가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양고기 국물에 국수나 말아 먹어볼까 하고 주변 식당들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맞은편 인도에서 칼을 갈고 있는 할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손놀림이 눈에 들어온다. 베이징의 여느 후통에서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칼갈이’ 풍경이다. 그런데, 그 칼갈이 할아버지의 칼가는 동작이 예사스럽지가 않다.

까만 뿔테의 둥그런 안경을 쓰고, 가정용 칼은 아닌 듯 싶은, 범상치 않게 생긴 긴 칼의 날을 한쪽눈을 감고 총쏘듯이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양새가 하루이틀 갈아본 솜씨는 아닌 듯 했다. 옆으로 다가가서 한참동안 구경을 하고 서있어도 한눈 한번 주지 않고 숯돌 위의 칼 가는데만 정신을 팔고 있다. 옆에 놓인 삼륜자전거 위에는 아직도 갈아야 할 칼들이 서너개는 더 놓여 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 칼을 손위에 올려놓고 날이 선 칼끝을 유심히 쏘아보던 할아버지가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문다. 드디어 칼 하나를 다 간듯 했다. 그제서야 두 눈길도 구경꾼에게 미친다.

“칼가는거 처음 봐? 뭐가 재밌다고 구경을 하나”
“할아버지도 이 뉴졔에 사는 회족이세요?”
“아니, 난 톈진 사람이야. 한 20년전에 베이징으로 왔지”
“칼은 언제부터 갈기 시작했나요?”
“베이징에 온 후부터니까, 대략 20년은 됐지”

그 칼갈이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65세인 까오짠리라는 분이다. 고향 톈진에는 아들 둘과 딸하나, 그리고 부인이 있다고 한다. 베이징과 톈진은 거리상으로는 바로 이웃한 동네인지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내려갈수 있는 지척이다. 그래서 굳이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고달픈 타향살이라는 생각은 안한다고.

젊었을 적에는 회사차를 운전하는 기사였는데, 이른 퇴직 이후에 뭘 해서 먹고 살아볼까 궁리를 하던중 마침 톈진에서 칼갈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친구의 권유로 ‘칼을 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다른 창업자본도 필요 없는데다가 칼가는 기술 하나로 이동네 저동네 돌아다니면서 그럭저럭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친구를 보고, 그 나이에 제격이겠다 싶어서 두말없이 친구를 스승으로 삼아 칼가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벌써 20년째 칼을 갈고 있다.

“칼만 갈아서 언제 돈 벌겠냐 싶었는데, 그래도 한 20년 되니까 제법 돈이 모이더라고. 중국이 막 개혁개방한 이후에 어느 세월에 다른 나라들처럼 잘 살겠냐 싶었던 것 하고 똑같지. 내가 칼을 갈기 시작한게 개혁개방 바로 직후니까, 나야말로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지. 이래봐도 난 사영기업가야. 하하하”

주로 정육점들이 몰려있는 뉴졔 골목길을 누비며 칼을 간다는 까오 할아버지의 한달 평균 수입은 1천위안(한화 약 15만원) 정도. 뉴졔의 정육점과 식당들의 칼을 월별로 계약해서 가는게 수입의 절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한 가게의 칼을 한 달 단위로 계약하는데, 대략 150위안정도 받는다.

자칭 ‘칼갈이 사영기업가’ 까오할아버지에게 ‘개혁개방된’ 세상은 그래서 좋다. 후통을 전전하며 버는 적은 수입이나마 맘 편하게 돈벌이 할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마오주석 시절에는 이것 저것 눈치 보는게 많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자유로워 졌다는 것. 이런 이유들이 까오할아버지로 하여금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예찬하게 하고 있다.

“걸핏하면 우파다 좌파다 하는 세상이었는데 그게 무슨 좋은 시절이었겠어.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정말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쩔지 모르지만 난 그래도 개혁개방 이후의 세상이 더 좋다고. 물론 마오 주석도 위대한 인물이지만 몇 년 뒤, 후손들은 아마도 덩샤오핑을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게 될거야. 우파니 좌파니 하고 사상을 따지는 시절보다는 편안하게 돈벌수 있는 지금이 좋아.”

그때, 어디선가 ‘삐리릭’하고 핸드폰 소리가 울린다. 주변에 핸드폰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울리는걸까 하고 잠시 의아해 하는 사이, 까오 할아버지가 허리춤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최신형 모토롤라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이다.

후통에서 칼가는 사람들은 많이 봤어도, 그들 허리춤에서 핸드폰을 구경하는건 또 처음이다. 요즘 베이징 길거리에서 핸드폰 안들고 다니는 중국인은 거의 희귀종이 되었다지만 후미진 후통의 칼갈이 할아버지도 핸드폰을 들고 다닐줄이야. 그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통화를 마친 까오 할아버지의 ‘투자 발전론’이다.

“세상이 변했는데 투자를 해야지. 써야할 때 돈을 쓰지 않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는 거라고. 요즘은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칼 갈아요’하고 외쳐봤자 뜨네기 장사밖에 못해. 정육점이나 식당 같은데서 급하게 칼을 갈 일이 있을 때 내가 어디 있는줄 알고 찾겠어. 핸드폰을 산 이후로는 어느 동네에 있더라도 단골들을 놓칠 염려가 없어. 칼간다는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갈수 있으니까.”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다 피운 까오할아버지가 다시 작업을 개시할 움직임이다. 찬물을 끼얹은 숯돌위에 칼을 쓱쓱 앞뒤로 한번 문지른 뒤 또다시 새 칼을 갈 준비를 하는 할아버지의 눈빛도 숯돌 위의 칼처럼 서슬이 퍼래지는 순간이다.

뉴졔 골목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저 무수한 ‘갓 잡은 신선한 고기’들이 아마도 까오 할아버지의 ‘칼’들에 의해 작살이 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섬뜩한(?) 생각을 해봤다.

골목안으로 양고기 소고기 국물냄새가 그 절정을 향해 퍼져가고 있다. 뱃속 깊이 그득하게 들어가는 그 냄새들은 하늘위로도 자욱하게 배여 간다. 점심 무렵, 베이징 뉴졔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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