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말기, 월(越)나라 여인인 서시(西施)가 강변으로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맑고 투명한 강물 아래 있던 물고기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헤엄치는 것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하여 침어(侵魚)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후 서시는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보내졌다. 그에게 패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충신 범려(范 )가 복수를 하기 위해 그녀를 바친 것이다.
부차는 너무도 아름다운 서시에게 현혹되어 국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월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서시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원제 때 왕소군(王昭君)은 화친을 위해 북쪽의 흉노(匈奴) 왕 선우(禪于)에게 보내졌다. 그곳으로 향하던 도중 멀리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본 그녀는 고향 생각이 나서 금(琴)을 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기러기들은 날개 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한다.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한(漢)나라 대신인 왕윤(王允)에게는 초선(貂蟬)이라는 양녀가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능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저녁 후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
이것을 본 왕윤이 말하길 "하하!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폐월(閉月)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후일 초선은 왕윤의 뜻에 따라 간신 동탁(董卓)과 여포(呂布)를 이간질하여 결국 동탁이 죽게 만든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唐)나라 미녀인 양옥환(楊玉環)은 현종(玄宗)에게 간택되어 입궁(入宮) 한 후로 하루종일 우울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랬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 :미모사)를 건드리게 되었다. 이에 함수화는 곧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이것을 본 현종은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이라며 극찬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화(羞花)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후일 귀비(貴妃)가 된 그녀는 절대가인(絶代佳人)으로 불렸다.
월하천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수욕을 하는 여인은 다름 아닌 호옥접이었다. 의복을 걸치고 있을 때에는 표가 별로 나지 않았지만 벌거벗은 그녀의 나신은 한 마디로 황홀하였다.
아직 완전히 발달될 나이가 되지 않았건만 제법 불룩한 유방과 양지유를 바른 듯 매끈한 복부, 그리고 잘록한 세류요와 잘 발달된 둔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아직은 풋풋한 느낌이 있지만 장차 서시나 왕소군, 초선이나 양귀비 못지 않은 미녀로 성장할 것이 분명하였다. 물론 삼백, 삼흑, 삼홍, 삼협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수욕을 하는 내내 장일정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남의의 문하에서 의술을 익히기 시작한 이래 둘은 친남매처럼 가까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한동안 같은 또래와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녀는 유별(有別)한 법이었다. 하여 가깝기는 하되 이 같은 광경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남몰래 그녀의 나신을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날 장일정은 호옥접이 수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젖은 몸을 닦고 의복을 걸친 뒤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금이 저린 것도 아닌데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 후 긴 한숨을 몰아 쉰 장일정은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이날 이후 그는 호옥접을 볼 때마다 이상스럽게 두 뺨이 달아 오르는 것 같고,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얼른 고개를 숙이곤 하였다.
시선이 마주치면 몰래 숨어서 봤다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웬만하면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침술 연마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시침을 하기 위하여 호옥접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간 장일정은 그녀의 포동포동한 팔뚝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손이 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해봐! 이번엔 특별히 조심해서… 알았지? 만일 이번에도 아프게 하면 오늘 저녁은 국물도 없어…"
"아, 알았어. 조심할게."
잠시 숨을 고른 장일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손목 부위에 있는 외관혈(外關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쉽게 침을 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경혈의 크기는 바늘구멍 만하므로 웬만한 경험으로는 제대로 찾는 것조차 힘든 법이다. 하지만 워낙 열심히 공부를 하였기에 경혈의 위치는 훤히 꿰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시침하지 못하는 것은 혈도의 정확한 위치 때문이 아니었다. 침을 놓으려면 싫던 좋던 접촉을 해야하는데 조금 전의 느낌이 되살아나서였다.
자신의 살은 거칠다면 거칠고, 딱딱한 반면 호옥접의 팔뚝은 너무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그리고 닿는 순간 이상스럽게도 전율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폭포수 아래에서 수욕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여 쉽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허험! 뭐 하느냐? 어서 시침을 해 보거라."
"아, 알겠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남의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두 볼이 붉어진 손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젖먹이였던 손녀가 이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대견하게 느껴진 것이다. 지금껏 한번도 발설(發說)한 적이 없지만 내심 장일정을 손서(孫壻: 손녀사위)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근에 인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올곧은 그의 심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네 다섯은 깨우치는 영특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깨우칠 때까지 파고드는 열성과 끈기, 그리고 인내심마저 갖추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일정이 손녀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둘이 마주칠 때면 먼저 시선을 돌리는 쪽은 언제나 장일정이었다. 그런 그를 자세히 살펴보면 손녀와 함께 할 때마다 볼을 붉혔다.
그런 모습은 과거 자신도 경험한 바가 있지 않던가! 하여 그가 손녀에게 연정을 느끼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손녀가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살펴보면 그녀도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녀가 유별하지만 손녀의 팔뚝에 침을 놓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속살이라면 속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남의는 장일정을 장래의 손서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야! 이번에도 또…? 대체 왜 그래? 연습할 때는 안 그랬잖아. 아휴! 아파라…"
"미, 미안해! 이상하게 손이 떨려서…"
"이노옴! 시침을 할 때에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였느냐? 만일 시침을 하다 잘못하여 유동혈을 건드리면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시침을 하도록. 만일 이번에도 접아(蝶兒)가 아프다고 하면 큰 벌을 내릴 것이야. 알았느냐?"
"예! 아, 알겠습니다. 정신 차려서 시침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일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침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호옥접의 섬섬옥수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손은 온통 땀으로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휴우…!"
잠시 후 호옥접의 손목에는 하나의 침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드디어 첫 번째 침이 박힌 것이다.
침이 박히는 순간 호옥접은 또 다시 통증을 느꼈으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랬다가 장일정이 혼나면 어떻게 하나 싶어 그랬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남의는 흐뭇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현재 손녀의 손목에 박힌 침이 정확한 혈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장일정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제 혈자리에서 약간 빗나간 곳에 시침해버렸던 것이다.
'허허! 녀석, 따끔거릴 터인데… 그래, 한참 좋을 때다. 한참 좋을 때고 말고… 너희들이 부럽구나. 흐으으음!'
지긋이 눈을 감은 남의는 젊은 시절 월궁옥녀와 사랑을 속삭이던 때를 회상하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가에는 아주 작은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신을 두고 먼저 세상을 뜬 월궁옥녀가 무정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흐음! 무심한 사람…! 천년, 만년 같이 살자고 해 놓고는 그렇게 일찍 갔소? 희매! 저승에서나마 보고 있소? 우리 손녀가 이제 제 짝을 찾을 나이가 된 모양이오. 희매! 보고 싶소.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그놈들에게 천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곧바로 희매에게 가겠소. 그때까지 기다려 주오.'
장일정과 호옥접은 남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과거에 있었던 참화를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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