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양로원에서 마주친다면

영화 속의 노년(49) -〈자연의 아이들〉

등록 2003.02.18 19:12수정 2003.02.1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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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78세 할아버지와 79세 할머니의 걸음처럼 느리다. 천천히 흘러간다.

양을 치며 홀로 살던 할아버지 게이리는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도시에 살고 있는 딸네집으로 온다. 딸과 사위, 손녀와 함께 살게 되지만 식탁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도통 왕래가 없었다가 갑자기 같이 살려니 나이든 아버지는 딸에게 짐일 뿐이고, 손녀 릴자는 자기 방을 빼앗겨 불만이다. 결국 어렵게 말을 꺼낸 딸을 따라 게이리는 양로원으로 옮긴다.


헬더와 한 방을 쓰게 된 게이리,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하다. 그러다 마주친 고향 친구 스텔라. 스텔라는 고향에 가고 싶어 양로원을 몰래 빠져나가곤 하는 문제의 입소자 신세다. 오래 전 고향을 버리고 떠난 게이리를 향해 스텔라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어"라고 말하며 옛 기억을 되새긴다.

스텔라가 고향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곳에 묻히고 싶어서이다. '내가 묻힐 곳은 내가 결정한다'고 말하지만, 양로원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스텔라는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게이리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던 중 게이리의 룸메이트인 헬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게이리와 스텔라는 새 운동화를 한 켤레씩 사 신고 있는 돈을 다 찾아 고향으로 향한다. 노인들의 실종 신고를 받은 경찰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두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가는 길. 쓸쓸하고 황량하며 바람이 분다. 차가 고장나자 운동화 신은 발로 걸어서 가고 또 간다. 그들을 태워준 트럭의 운전 기사는 그들의 고향 호른스트란데에는 이제 절벽과 폐허가 된 군 기지 밖에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배를 타고 안개를 헤치며 도착한 고향.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벽난로 불빛 앞에 앉은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활기찬 해변의 모습과 서로 도와 같이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향은 어디로 갔을까, 고향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불꺼진 벽난로에는 타버린 재만 남아있고 흔들의자 하나는 비어있다.


관을 직접 만들어 그 안에 스텔라를 눕히고 땅에 묻은 게이리는 홀로 서서 성가를 부른다. 이제 다시 혼자 남은 그는 맨발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고향에서 그는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다.

어느 한 시절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눠가졌던 우리가 나이들어 양로원에서 마주친다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될까. 게이리와 스텔라는 고향에 가기 위해 새 운동화를 신고 먼길을 떠났는데, 우리는 그 어디를 눈감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꿈과 사랑의 장소로 기억하며 향하게 될까. 아니 과연 같이 새 신을 갈아신고 손잡고 길 떠날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있기나 할까.


고독과 소외로 사람을 몰아넣는 도시를 떠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게이리와 스텔라. 비록 죽음과 맨발로 남았지만 그들은 자유다. 도시에서 그리고 양로원의 삶에서 탈출해 고향을 찾았기에 그들은 이제 자유다. 그들을 불러들인 고향은 지금 비록 폐허로 남아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하지만, 결국 떠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 그들은 고향 땅에 묻힐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며 바람이 불어대는 길. 넓은 화면이 아닌 안방 텔레비전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나이듦과 죽음은 그 황량함과 쓸쓸함 자체로 오래 가슴에 남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든다. 중간에 나오는 착시와도 같은 현상, 마치 환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 역시 인생에서 문득 마주치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줄거리를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고, 그 내용을 쉽게 풀어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들 노년의 삶이 갖는 무게로 인한 것이리라. 양로원에서 마주친 옛날 친구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래도 부러운 것은 갈 곳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노년이야말로 나의 꿈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이들, Children Of Nature / 감독 프리드릭 쏘 프리드릭슨 / 출연 지슬리 홀돌손, 시그리도 하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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