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일어서기 위한 준비입니다

<나르시스의 꿈>, 슬픔의 해석학

등록 2003.02.26 13:46수정 2003.02.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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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찬란하기만 할까요? 극한까지 밝아져 더 이상 밝힐 어둠이 없을 때도 그 빛은 찬란할 수 있을까요? 빛의 찬란함은 어둠이 있어야 두드러지기에 만약 어둠이 없다면 만들어내려 합니다. 어둠을 조장하는 빛, 그 악마적인 매력에 유혹되어 날아드는 나방은 제 몸이 그 찬란함 속에 사그라지는 줄도 모릅니다.

상실은 아프기만 할까요? 더 이상 빼앗기고 짓밟힐 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을 때 상실은 용기로 변하곤 합니다. 현실의 약자는 소유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현실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을 때 변화의 용기가 솟구칩니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은 상실 속에 용기를 품습니다.


a 책표지

책표지 ⓒ 한길사

<나르시스의 꿈>에서 김상봉 선생은 저 찬란한 서구 정신을 나르시스라 칭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결국 자아도취에 빠져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 했던 젊은이 나르시스. 서구가 들으면 나르시스라는 지칭만으로도 기분 나쁠 듯한데, 한술 더 떠 나르시스의 '꿈'이라 칭합니다. 그 자아도취는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는 거죠. 심지어 꿈에서 깨려는 노력마저도 자아도취를 인정하지 않기에 공허합니다.

"현대 철학이 아무리 동일성의 원리와 주체성의 원리를 비판하고 차이와 타자를 들먹인다 하더라도, 그 모든 수사가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서양적 사고방식, 서양정신의 주체성과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한 걸음도 이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14쪽).

그 누가 이렇게 당당히 서구의 정신을 비판할 수 있을까요? 글의 서두에서부터 속이 시원해집니다.

지은이소개

김상봉 -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괴팅겐, 프라이부르크,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 서양고전문헌학, 신학을 공부하고 칸트의 <최후유고>(Opus postumum)에 대한 연구로 1992년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지은 책으로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세 학교의 이야기>, <호모 에티쿠스>, <나르시스의 꿈>이 있다. 옮긴책으로는 <칸트 순수이성비판 입문>이 있으며, 논문으로 '칸트와 숭고의 개념', '독일관념론과 나르시시즘의 변모', '자기와 타자 -- 헤로도토스와 그리스적 자기의식'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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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런 당당함은 우리 것에 대한 고집과 아집에 머물곤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우리 것을 알려면 우리 것을 잔인하게 짓밟았던 서구의 것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야 서구와 우리의 다름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나르시스의 꿈>은 이처럼 우리와 서양정신의 차이를 말함으로써 서양정신의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 이자 "동시에 이 차이를 통해 우리의 정체를 박히려는 시도"(17쪽)입니다.

책 속에서 제일 많이 얘기되는 단어는 '홀로주체'입니다. 바로 나르시스의 표상이죠. 상실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타자를 만나지 못했던, 항상 자신만을 의지해 왔던. 타자를 이용대상으로만 보았기에 서구는 '만남'의 경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만남은 "너를 위해 나를 양보하는 것, 네가 나 속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것", "너에게 나의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 "때로는 너를 위하여 나의 자유를 버리는 용기에 존립하는 것"(31쪽)이니까요.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만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나르시스의 꿈>은 '서양정신의 아름다움과 숭고'로 시작됩니다. 플라톤, 롱기노스, 칸트를 통해 서구의 아름다움과 숭고에 대한 갈망을 해부해 들어갑니다. 선생의 날카로운 메스는 그 완고한 아름다움의 배를 가르고 숭고한 도덕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정신을 건드립니다. 서구의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감성적 차원과 지성적 차원을 매개하고 인간을 도야시켜 자유를 지향하게 하니까요.

하지만 그 자유는 따뜻함이 아니라 차가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외부와 조우하지 않고 자기 속으로만 파고듭니다. 서구 정신의 아름다움과 숭고는 외적인 자연이 아니라 내적인 이성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참된 도덕성은 오직 자연적 정념의 저항을 극복하는 의지 속에 그리고 모든 경향성을 부정하는 마음씨 속에 존립"(157쪽)하게 됩니다.


이 내면화된 차가운 이성은 자유롭습니다."자유의 이념은 서양정신의 본질적 진리"(26쪽)입니다. 이 자유는 능동적인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서구정신은 이 나르시시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홀로주체성에 머뭅니다. 억압에 의해 머물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 스스로 머물려 합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긍지를 갖기에 진정한 타자를 갖지 못하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자립적 타자를 만들어내다 결국 총체적 자기상실로서의 죽음을 맞는 나르시스의 삶을 되밟아가게 됩니다.

김상봉 선생은 이 나르시시즘의 근원을 찾아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완성을 칸트의 독일관념론에서 봅니다. 그 찬란함의 결과는 악마적입니다. 좀 길게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본질적으로 서양적 보편성 아래 포섭되어버린 전 지구 위에 아직도 서양적 보편성이 매개하고 내면화시켜야 할 부정적 타자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서양정신은 적대적 타자를 통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 서양문명이란 그리스 이래 자기에게 적대적인 타자를 정립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내면적 계기로 매개함을 통해서만 운동하고 발전해온 문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를 타자로서 정립할 수 없는 서양정신은 자기를 자기로서 정립하는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서양정신의 노쇠한 삶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들은 UFO나 외계문명을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이슬람교도나 중국인 또는 북한 사람들의 이마에 뿔이 돋아나게 만드는 절망적인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216∼217쪽).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슬픈 현실을 뒤바꿀 힘은 나르시시즘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나르시스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될 뿐이니까요. 그의 시선은 남을 대면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김상봉 선생은 서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변화의 힘을 찾으려 합니다. 거만한 서구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슬픈 근대사 속에서, '슬픔의 해석학' 속에서 그 힘을 찾으려 합니다.

김상봉 선생은 일제 식민지를 살다간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에서, 박정희 군부정권을 살다간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 슬픔 속에 깃들인 존재의 진리와 슬픔의 해석학을 찾아냅니다. "슬픔은 격분과 달리 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것"이기에 "슬픔 속에서 생각은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301)입니다. 바로 이 과정이 우리가 다시 주체로 설 수 있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아픔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복귀하고 우리 자신과 하나된다. 그리하여 역사의 슬픔이 곧 지금 우리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되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며, 모든 주체가 그러하듯, 우리 또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 주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과 슬픔은 우리의 자기의식의 본질적 내용이다"(328쪽).

그래서 우리의 철학은 저 찬란한 서구의 빛을 무조건 좇아가거나 복고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슬픔 속에 동참하고 어둠 속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선생은 철학이 "어둠의 깊이를 향해 낮아지려는 결단"에, "빛에 대한 동경이기 이전에 어둠에 대한 동참이어야만 한다"고 외칩니다.

"무지와 오류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늘어놓는 고상한 설교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통스런 부르짖음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이는 영혼의 애절한 긴장과 집중에 존립한다"(352쪽)고 주장합니다. 고난과 슬픔에 귀기울이고 그 의미를 묻는 것 그것이 철학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촛불시위를 통해 그 결단과 동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그 고통과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둠에 동참했기에 촛불이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에 대한 반대나 지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말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고통을 참아야 했던 우리의 모습을 대면하고 그 슬픔에 귀기울이게 된 자각이자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 자각과 결단은 이라크전에 대한 반대, 반전평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철학은 다시 씌어지리라 믿습니다.

저에게 <나르시스의 꿈>은 단순히 '텍스트'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나르시스는 서구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도 스스로를 나르시스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나르시스를 동경하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상봉 선생은 서구의 꿈만 지적하지 않고 '학벌'을 고집하는 우리사회의 나르시스들과도 싸우며 학벌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교수직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상실의 아픔에 머물지 않고 학벌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선생의 용기를 지지합니다.

상실을 경험했다 해서 모두 용기있게 일어서는 건 아닙니다. 짓밟히고 빼앗긴 자는 소극적이기 마련입니다. 그 소극성을 딛고 일어서려면 혼자 힘으론 어렵습니다. 선생은 학교를 떠나 대중을 만났기에 힘을 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선생이 씨 을 외친 함석헌 선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대중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서가 아닐까요?

선생의 다음 책을 기다립니다.

나르시스의 꿈 -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김상봉 지음,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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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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