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방’의 커피가 더 맛있는 이유

[책 읽어주는 남자] 김상봉의 <나르시스의 꿈>

등록 2006.11.07 17:10수정 2006.11.0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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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상봉의 <나르시스의 꿈>

김상봉의 <나르시스의 꿈> ⓒ 한길사

스타벅스를 요즘 '별 다방'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누가 해석을 했는지 무릎을 치게 하는 위트이다. 그런데 이 촌스러운 이름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모양이다.

사실, 커피의 원산지가 여기가 아니니 자연히 원산지와 가까운 것을 찾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일한 원료의 커피라면 어디서 먹든 그 맛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터. 또 그렇다고 '별 다방'의 커피 맛이 다른 곳보다 뛰어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유독 '별 다방'만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맛보다는 '폼'(?)때문일 것이다. 흔히 '별 다방'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을 넘어 '별 다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를 먹고 마시는 계층(?)에 편입되었다는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별 다방'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미국의 뉴요커다. 뉴요커는 미국 뉴욕의 지식인이나 중상층이라고 할 수 있는 고학력의 상위중류층을 일컫는 말이자, 성공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하필 성공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미국의 뉴요커에서 찾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면서 매우 복잡하다. 쉽게 말해 우리의 사고 틀이 유무형의 사회문화적 학습과정을 통해서 성공의 상징을, 닮아가고 싶은 대상을 뉴요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현상의 하나가 바로 '된장녀' 논란이었다.

누군가를 닮아간다는 것, 그것을 따라한다는 것의 유행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하나의 경향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류에 따라 변화는 유행이 아니라 뉴요커처럼 살고자하는 욕망, 그 겉멋의 모방을 넘어 우리의 사고의 틀마저 뉴요커가 되고자 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고마저 뉴요커처럼 되고자 하는가


물론 어느 공안 검사 출신 의원의 황당한 발언처럼 반미를 한다고 해서 영어마저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의미로 '별 다방'의 문화를 소비한다고 해서 모두가 사대주의자는 아니다.

문제는 '별 다방'이 가지는 기호,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먹고 마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뉴요커에 편입되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넘어 뉴요커가 가지고 있는 서구적 정신에 우리의 정체성마저 내놓을 수도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김용희 교수는 '기호는 힘이 세다'며 그 센 이미지에 눌러 그것에 우리의 정신을 팔고 있다고 비판을 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아니, 그렇다면 서구적 정신과 문화는 '악'이고 우리의 정신은 무조건 '선'인가, 문화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반문을 할 것이다.

타당한 반문이다. 하지만 서구정신의 폐해를 알게 된다면 앞서의 우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바로 김상봉 교수가 <나르시스의 꿈>에서 비판하고 있는 서양정신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그는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도취되어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굳어 수선화가 된 것처럼 서구정신 또한 자신들의 정신에 도취되었다고 비판을 한다.

그래서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서양정신은 자신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위해서는 온갖 정성과 열정을 바치면서도 타자의 고통과 아픔에는 무관심을 넘어 타자를 자기애를 위해 죽음과 고통으로 몰고 갔었다며 혹독하게 김 교수는 비판을 한다.

김 교수에게 있어 서양정신은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이다. 지금도 기독교 정신이라는 미명하에, 세계평화라는 구실로 타자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는 나라가 바로 서양정신을 대표한다는 미국인 것을 보면 김 교수의 비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서양정신내부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사상적 이단아라 불리는 니체가 있기는 했지만 김 교수에게 니체 또한 서구정신 안에서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서구정신의 극복으로 볼 수 없다며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것이다. 왜, 서구정신을 극복해야 되는지, 굳이 그것을 극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도,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말이다. 김 교수가 밝히는 이유는 매우 명료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뗀 적이 없는 그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불행한 정신의 소유자가 바로 서양정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답습하고 그것을 모방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갖 열정을 붓는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사상에 도취된 서구 정신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김 교수는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충분히 그 역량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린 서양정신의 바깥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서양정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에게는 서구정신이 갖지 못한 타자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동참한 정신이 유구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만해 한용운의 시, 함석헌의 사상, 박동환의 철학 속에서 서양정신의 극복의 키워드를 찾는다.

그래서 그 키워드를 가지고 '별 다방'에 뺏긴 우리의 정신을 되찾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다만 무엇을 먹고 마시든 이왕이면 우리의 정신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과연 커피 한잔이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아무리 '기호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순간부터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뉴요커의 스타일은 물론이고 그들의 이기적인 자기애적 사고마저도 모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면, '테이크아웃'은 그 자체로 이미 타자와의 관계성보다는 자기애가 더 강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별 다방'의 문화를 소비하는 것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혹,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마저 놓치게 될 경우에 우리가 져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전문적인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권하는 것이다. 읽기가 다소 벅차다면 프롤로그라도 읽기를 권한다.

나르시스의 꿈 -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

김상봉 지음,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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