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 쑥떡 쭉 늘려 조청 찍어 먹는 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9> 콩떡, 인절미 그리고 쑥떡

등록 2003.03.01 21:38수정 2003.03.0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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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래떡 연탄불에 구워 먹는 맛도 참 좋습니다.

가래떡 연탄불에 구워 먹는 맛도 참 좋습니다. ⓒ 김규환


설이 한 달 지난 오늘쯤까지 집에는 떡이 남아 있었다. 옆집 승호네는 명절 때마다 떡을 닷 말이나 해도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었지만 우리 집은 사뭇 다르다. 젯상에 빠지면 안 되는 음식이었기에 마련한 것이지 썩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쌀을 낭비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을 정도다.


이러니 닷 되 정도면 넉넉하다. 그나마 식구들이 떡을 먹을 때는 떡 메를 치고 '안반'(떡할 때 쓰는 도구로 나무판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반반하게 만든 것) 위에서 콩고물을 묻혀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먹기 좋게 모양을 만들어 칼로 썰어 줄 때나 서너 입 씩 먹는 게 고작이다.

떡이란 떡은 그 뒤로 정월대보름 까지는 아예 자취를 감춘다. 보름 음식이 들어가고 나무하러 갈 때나 야밤 출출할 때 밥에 찌면 조총 한 종지 갖다가 찍어 먹는 재미로 살았으니 한 달 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떨 때는 푸른곰팡이가 탱탱 슬어 상해서 버릴 때도 있다.

그래도 종류별로 할 건 다 했다. 멥쌀로는 떡국 쒀 먹을 떡가래(가래떡)를 뽑고, 상에 올릴 흰떡을 길고 납작하게 만들어 떡살무늬 판을 "꾸~욱" 눌러 참기름 발라 엉기지 않게 한다. 여러 꽃무늬와 전통 문양이 들어간 떡살판 구해 오는 건 막내 차지였으니 누구 집에 그 물건이 있는 건 내가 안다. 얼른 쓰고 돌려 줘야 이웃들 불평이 없으니 때 맞춰 빌려 오고 갖다 주는 솜씨도 있어야 했다.

찹쌀로는 인절미 종류를 하는데 인절미를 맛있게 먹으려면 며칠 전부터 수선을 떨어야 한다. 잘 씻은 콩을 볶아 콩고물을 넉넉히 준비해 봉지에 잘 싸 둬야 하며, 식혜를 슬슬 끓이면 맑은 물이 농 짙어지면서 짙은 커피색으로 변하면서 꿀보다 더 맛있는 진득한 조청을 만들어 둬야 한다.

섣달 그믐날 시루에서 꺼낸 뜨거운 밥은 뜨겁기도 하거니와 무게가 수월찮기 때문에 큰 양푼에 담아 확독 까지 옮기기는 쉽지 않다. 찹쌀을 옹기 시루에 밀봉을 하여 잘 쪄서 익으면 확독에 넣고 장정 두 명이 번갈아 가며 떡방아를 찧는다. 떡 메를 치는 풍경이 아름답기도 해 주위에서 뽀짝거리고 있으면 밥태기가 얼굴로 튀어 묻혀 온 그 향에 취하기도 한다. 먼저 물을 한바가지 떠다 놓고 손을 식힐 겸 달라붙지 않게 이겨주는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와 형들은 번갈아 가며 메치는데 나는 몇 번 해보곤 손대지 못하고 커버렸다.


a 실은 제 동네에서는 콩고물 묻힌 것은 콩떡, 쑥 들어 간 것은 쑥떡, 떡취 들어간 것을 인절미라고 해서 한참 동안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일 맛 있는 것은 떡취 들어간 것입니다.

실은 제 동네에서는 콩고물 묻힌 것은 콩떡, 쑥 들어 간 것은 쑥떡, 떡취 들어간 것을 인절미라고 해서 한참 동안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일 맛 있는 것은 떡취 들어간 것입니다. ⓒ 김규환


찰떡은 쑥이든 뭐든 아무 것도 넣지 않고 고물만 묻힌 일반 인절미와 단오 이전에 뜯어 말려 둔 쑥이나 고사리 꺾으러 갔다 굳혀둔 붕대라 불렀던 '떡취나물' 말린 것을 찹쌀 찌는데 넣고 삶아 푹푹 찧어 만든 쑥떡 또는 붕대떡이 있다. 붕대떡의 그 쫀득한 맛은 쑥떡이 못 따라오고 일반 인절미는 반에 반도 차지하지 못한다. 먹을 수록 쫀득쫀득하고 차지다(찰지다). 거기다 쑥향까지 나니 만들기도 간단하면서 떡 중의 떡이라 할 만하다.

이런 맛있는 떡을 우리 집 식구들은 아예 손대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떡은 따로 있다. 바로 꽝꽝하게 삐삐 말라비틀어진 떡을 구우면 상황은 달라진다. 긴긴 밤 이른 저녁밥을 먹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는 잠을 청할 수 없는 법. 이 때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은 내복 채 나가서 떡을 구워와야 한다.


부엌으로 난 쪽문을 통과하여 아궁이를 헤집는 일이 시작된다. '잉그락'(불잉걸)이 삭을라 든 잔불을 부지깽이로 들춰 적사에 긴 가래떡 두 개씩을 올려 시나브로 구우면 아이 팔뚝만큼 도톰한 떡이 부풀어올라 "피시 피시식" 방귀 소리를 내며 터진다. 겉은 약간 타고 속은 야들야들 부드러워지면서 메칠 때 덜 빻아진 쌀알이 구분될 정도로 맛나게 구워지고 새 생명을 얻는다. 호롱불 밖에 없던 시절이라 다 구워지는 것을 소리와 냄새로 알아차릴 밖에.

구운 떡은 겉이 타면서 쑥향을 부엌에 가득 드리워 구미를 당기는데 조청 그릇 찾는 일이 다급해 진다. 설강(재래식 찬장) 위에서 조심조심 찾아도 스텐 그릇 일색이라 "덜그덕덜그덕" 소리 요란해진다. 어른들께선 '고양이가 왔는갑다'며 궁시렁 대다가 마신다.

외풍이 심한 방 이불 속에서 구운 떡을 쭉 늘려 조청 찍어 먹는 맛 꿀단지가 안부럽다. 구워지길 기다리다 잠자는 사람 덕에 깨어 있는 사람 몫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옛말에 '난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는 법'이니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면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a 아직 석작에 보관돼 있는 떡이  있거든 이런 불에 한 번 구워드세요.

아직 석작에 보관돼 있는 떡이 있거든 이런 불에 한 번 구워드세요.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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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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