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동문이 된 우리 외사촌

등록 2003.03.05 13:06수정 2003.03.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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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외사촌 녀석이 육사에 입학(?)을 했다. 내일이면 기초군사훈련 받는다고 자기 혼자 진주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서 하루 밤 머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주나 흘러갔던 모양이다. 처음엔 육사도 대학이겠지 하는 생각에 녀석의 처지를 우습게 알았다.


친구들한테 전화한다고 우리 집 앞 공중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도, 여자친구랑 채팅해야 된다며 세이클럽인가 뭔가를 좀 깔겠다고 부산을 떠는 모습도 그렇게까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밤이 늦었는데도 요 녀석은 명동이나 구경하러 가자했다.

"야 이 자슥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명동이냐"며 난 일언지하에 면박만 주었다.

a 화랑관 앞에서 선 외사촌

화랑관 앞에서 선 외사촌 ⓒ 류종수

세월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비록 몇 년 전이었지만 나도 진주교육사령부(공군)에서 그 치가 떨리는 훈련병 시절을 겪었으면서 녀석의 입소를(말로는 사병훈련보다 빡시다는데) 그렇게 우습게 보았으니. 아무튼 녀석을 입소하는 날 육사에 들여보내고 나서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교관의 말에 녀석은 달랑 맨 몸으로 학부모 통제선을 너머 훈련생 대열 속으로 뛰어갔는데 꼭 울 엄마랑 훈련소에서 헤어질 때가 생각났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밤 나이트나 한번 같이 가줄걸...'

그랬던 녀석이 입학식 행사를 한다고 예복을 입고 연병장 저 어디에 서 있었을 것이다. 함께 간 외삼촌은 무비카메라를 들고 자랑스런 아들을 위한 영화 한 편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외숙모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열 속에 있을 아들 찾기에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셨다. 분열(행진의 군대용어)이 시작되자 그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품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이제는 생도라고 불리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참 애처로워 보였다. 중대 맨 마지막에 있던 한 키 작은 여 생도는 우로어깨총을 한 채 큰 걸음으로 행진하는 대열을 따라가기에 무척이나 벅차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박자와 간격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리라.

행사가 끝나고 생도들과 부모님의 만남을 위해 생도숙소로 갔다. 온갖 이데올로기로 치장한 화랑도 예복을 벗고 쫄쫄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생도들이 하나 둘 걸어 나왔다. 여기저기서 목청이 찢어져라 악을 써가며 부모님 앞에서 신고식을 해댔다.


그 혼란 중에 우리는 우리의 '아들'을 찾지 못해 또 한번 두리번거렸고 잠시 후 누군가 날 확 잡아 댕겼다. '나 여기 있는 왜 못 찾느냐'듯 녀석은 큰 눈을 부라리며 날 돌아 세운 것이다. 숙모도 돌아섰고 녀석도 신고를 해댄다. 목이 쉰 녀석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숙모는 눈물을 훔치며 아들을 부둥켜 안는다.

어릴 적부터 좀 과장하면 내가 키우다시피 한 녀석이 어느새 그렇게 성장해 있었다. 녀석이 처음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난 일순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날 잘 따르던 코흘리개가 나와 같은 대학생이 된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올해 졸업을 했고 녀석은 군바리의 길을 들어섰다.

'의리 하나로 사시는' 삼촌 밑에서 세뇌(?)되다시피 한 녀석은 훈련을 이겨낸 자신이 만족스런 모습이었다. 훈련생 때의 지긋지긋한 체험들, 자신의 고문관 같았던 행동들을 연신 이야기하며 벌써 군인이 다 된 것처럼 굴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묘한 감정이 일었다. 박정희의 군사문화가 이 땅의 가장 큰 망령일진데 나의 피붙이가 언제가 자신의 이름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교훈탑이라는 곳에 새겨 넣을 걸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된 군인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입소하러 가던 날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농담 삼아 입소포기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녀석의 무사함만을 바랄 뿐이다. 청춘의 파란만장한 방황과 그 시절로부터 싹틔울 풍요로움을 저당잡힌 채 규율과 인내를 몸에 배가지고 나올 녀석에게 감히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말할 수 없다. 모든 인생은 자기에게 달렸기 때문이리라.

어디에 있든 진정한 자기를 찾지 못하면 매 한가지일 것이니 체제의 폭력보다는 자기훈련의 건강함을 익히고 돌아오길 바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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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꿈을 해몽한다" 작가 김훈은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말은 질펀하게 넘쳐났고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은 웃자란 말들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불어갔다"고 부끄럽게 회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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