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목련이 필 때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8>백목련

등록 2003.03.10 16:25수정 2003.03.1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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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목련을 바라보면 손가락 한 마디 잘린 그 가시나가 생각난다

백목련을 바라보면 손가락 한 마디 잘린 그 가시나가 생각난다 ⓒ 우리꽃 자생화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스한 기억들
언제까지 내 사랑이여라 내 사랑이여라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움 나
아름다운 사랑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 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김희갑 작곡, 양희은 작사,노래 "하얀 목련" 모두)



목련이 피고 있다. 손가락 한 마디 잘린 그 가시나의 목덜미처럼 하얀 목련이 가냘픈 가지마다 큼지막한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가끔 진눈깨비를 몰고오는 꽃샘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잎사귀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나무가 목련이다. 물론 잎사귀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는 많다. 오늘도 제법 찬 봄바람에 함박눈 같은 꽃잎을 휘날리고 있는 저 매화도 그렇고, 마악 떼지어 피어나다가 꽃샘추위에 놀라 노오란 얼굴을 오소소 움츠리고 있는 개나리도 그렇다. 또 지금도 동그란 몽오리를 마악 돌돌 말고 있는 벚꽃도, 이제 마악 기지개를 켜고 있는 진달래도 그렇다.

파아란 잎사귀 한 점 없이 하얀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목련을 바라보면 아름답다기보다 이상하게 애잔한 슬픔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지금, 저 하얀 목련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슬퍼서일까. 아니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메마른 가지에 목련꽃이 마치 환자처럼 하얀 얼굴로 매달려 있기 때문일까.

마른 가지와 흰 색, 그래. 어쩌면 마른 가지와 흰 색은 모두 텅 빈, 아니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원점이라는 그런 뜻을 가진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백목련의 꽃말은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백목련이 티끌 한점 없는 깨끗한 흰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하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과 땅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그런 시절, 하늘 나라에서는 하늘 나라 왕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쁜 공주가 살았다. 하늘 나라 청년들은 누구나 그 예쁜 하늘 나라의 공주를 짝사랑하면서 흠모했다.


하지만 하늘 나라 공주는 오로지 땅의 나라 북쪽에 살고 있는 바다지기만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 나라 공주는 아버지 몰래 하늘 나라 궁전을 빠져 나와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바다지기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늘 나라 공주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지기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하늘 나라 공주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고 또 비관하다가 그만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 며칠 후 바닷가로 쓸려온 하늘 나라 공주의 시신을 발견한 바다지기는, 하늘 나라 공주의 애닯은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하늘 나라 공주를 자기 집 앞에 있는 앞산에 고이 묻어 주었다.


한동안 자신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죽은 하늘 나라 공주를 생각하며 긴 슬픔에 잠겨 있던 바다지기는 마침내 자기의 아내에게 잠자는 약을 먹인 뒤, 하늘 나라 공주 곁에 나란히 묻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늘 나라 왕은 하늘 나라 공주를 백목련으로, 바다지기 청년의 아내를 자목련으로 피어나게 했다고 한다.

a 지금도 그 바다지기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지금도 그 바다지기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 우리꽃 자생화

봄에 듣는 이야기치고는 참으로 슬픈 사랑이야기다. 이처럼 나에게도 해마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가슴 저리도록 아픈 기억 몇 토막이 늘 떠오른다. 그래. 그때도 매화꽃잎이 함박눈처럼 하얗게 바람에 흩날릴 때였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공장 담벼락에서 노오란 개나리가 마치 노랑나비처럼 떼지어 나폴거릴 때였다.

"악!"
"아니, 저 가시나 저기 와 저라노?"
"손... 손..."
"손이 와? 이런이런~ 인자 이 일로 우짜것노?"
"빨리 찾아라카이? 그라고 찾으모 알코올로 소독한 뒤 퍼뜩 산재병원으로 달려오이라!"

프레스 앞에서 초침처럼 정확하게 제품을 찍으며 열심히 일을 하던 스무 살 남짓한 그 가시나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가시나의 잘려나간 검지 손가락에서는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솟고 있었다. 프레스 기계 속에는 약간의 핏자국만 묻어 있을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가시나가 작업반장의 등에 업혀 급히 떠난 뒤 십여 분쯤 지났을까. 그 가시나의 손가락 한마디는 칩통에서 쇳가루를 온통 뒤집어 쓴 채 발견되었다. 재봉합을 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 가시나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던 머스마 한 명이 그 손가락을 솜에 싸들고 산재병원으로 뛰었다.

"우째 됐노?"
"여기!"
"에이~ 저리 치야뿌라. 재수 없다. 그라고 그걸 요까지 와 가꼬 왔노?"
"그 가시나 그기 울면서 내 보고 하는 말이 목련꽃 나무 아래 묻으라카더라"
"내 참! 올개 들어서만도 벌써 몇 번째고?"
"그라이 하얀 목련이 자꾸 핏빛으로 물드는구먼"

a 티끌 한 점 없이 너무도 흰 까닭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이 붙었을까

티끌 한 점 없이 너무도 흰 까닭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이 붙었을까 ⓒ 우리꽃 자생화

그랬다. 당시 프레스반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가시나들뿐만 아니라 머스마들의 잘려나가는 손가락들도 모두 자목련 나무 밑에 묻었다. 해마다 자목련은 백목련보다 조금 늦게 꽃을 피웠다. 하얀 목련꽃이 마치 바나나 껍질처럼 늘어질 때가 되어야 자목련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프레스반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목련은 흰 색깔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프레스반에서 한 달에 서너 번씩 잘려나가는 손가락을 목련나무 뿌리에 묻은 뒤부터 목련꽃이 마치 피 같은 자색으로 피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그 가시나 그거는 인자 누가 책임질끼고?"
"손가락 한 마디 없는 가시나를 누가 데려 갈끼고. 작업반장이 책임져야지"
"야야~ 그라다가 작업반장을 하는 기 아이라 아예 의자왕 행세 하겄다"
"그라이 봄에는 특별히 조심해라꼬 그만큼 일렀건만"
"아, 춘곤증도 춘곤증이지만, 철야로 밥묵듯이 했으이 지가 안 졸고 우째배기끼고"

그랬다. 그날도 귀가 멍멍하게 돌아가는 프레스반 앞 뜰에서는 쇳가루가 모래처럼 수북히 쌓여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쇳가루 속에 우뚝 선 목련나무에서는 하얀 목련이 마치 잘려나간 손가락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무더기로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도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손가락 한마디 잘린 그 가시나의 눈에서 이슬처럼 뚝뚝 떨어지던 그 눈물이 생각난다. 그 가시나들은 그때 프레스반에서 같이 일했던 그 머스마들의 말처럼 아직도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을까. 아니면 석녀가 되어 오늘도 저 하얀 목련꽃을 바라보며 잘려나간 손가락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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