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보내는 신호음

등록 2003.03.13 11:22수정 2003.03.1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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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던데, 올해는 풍년이겠네."
"그것도 어느 정도지, 올해처럼 너무 내리면 좋을 리가 있겠어?"
"하긴 그래. 곧 밭도 갈고 해야 하는데, 저렇게 눈이 지천이니."


밭을 살펴보러 골짜기로 들어온 친척 동생 둘이 그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작년에는 너무 가물어 탈이었는데, 올해는 늦도록 눈이 그치지 않아 걱정입니다.

한 주만에 찾은 고향집은 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흰 눈이 가득합니다. 한 낮에는 햇살에 제 몸을 녹이던 눈들이 저녁 무렵이 되면 다시 꽁꽁 얼어버립니다. 그래서 한 겨울보다도 집 앞의 길은 더 미끄럽습니다.

동생들은 그저 먼 발치서 밭을 바라만 보고 다시 마을로 내려가 버립니다.

"내일 밭에 계분 넣기로 했거든요. 내일 올게요."

아직 밭에는 눈이 그득하지만, 그래도 농사철은 철이라 농부의 마음은 결코 한가하지 않은가 봅니다.


나는 집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발길을 옮깁니다. 언덕과 밭 사이로 난 길에도 눈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발목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 한겨울처럼 시리거나 싫지 않은 걸 보니 봄이 오긴 오는가 봅니다. 지리산 자락에는 매화와 산수유가 한창이라는데, 이곳 강원도는 아직 눈 세상입니다.

그러나 눈 세상에도 봄은 오는 법이지요. 집 뒤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허리를 굽히고 살펴보니, 길 가 눈 덮인 도랑 아래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입니다. 문득 "얼음장 밑으로 봄이 봄이 와요"하는 어릴 때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봄이면 사래를 모르게 긴 밭 위로 온통 눈이 쌓였는데, 발자국이 산을 향해 나 있습니다. 그 발자국은 제 주인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듯, 눈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아마도 노루나 고라니 종류의 발자국일 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눈밭에 엎드려 발자국을 바라봅니다.


눈 밭을 어느 짐승이 걸어갔을까? 아득하게 사라진 짐승 발자국
눈 밭을 어느 짐승이 걸어갔을까? 아득하게 사라진 짐승 발자국최성수
사람이 없는 지난 주 내내, 이곳은 짐승들이 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 새 발자국도 있고, 무슨 짐승인지 모를만큼 커다란 발자국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주인이고 제가 손님일 지도 모릅니다. 온갖 나무와 풀과 짐승들의 집에 어쩌다 찾아와 신세를 지고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닐까요?

지난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마당가 드럼통에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인 후였습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드럼통 아래 불 때는 곳에서 새들이 몇 마리 후루룩 날아올랐습니다. 우리 집을 찾아 온 채연이 아빠가 후다닥 달려가 드럼통 밑을 살펴보더니 손을 넣어 새 집을 꺼냈습니다. 풀을 얼기설기 엮어 지은 새 집에는 알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우와, 새 집이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드럼통에서 나온 새는 마당 가에서 팔짝팔짝 뛰며 제 집을 지켜보는 게 아닙니까. 자세히 보니, 함께 나온 다른 새끼들은 밭고랑에 숨겨 두고, 하나 남은 알이 걱정이 되어 드럼통 근처에서 안절부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드럼통에는 불길이 활활 붙고 있었고, 어미 새는 채연이 아빠가 들고 있는 새 집 주변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채연이 아빠는 얼른 새 집을 변소 옆 나무 위에 올려 놓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새는 제 집에 들어가 알을 감싸 안기도 하고, 옮기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그러던 새는 그만 알 옮기기를 포기했는지, 아기 새들이 폴짝폴짝대는 밭고랑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제야 우리들은 새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 알은 곯아 부화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새끼들은 다 알을 깨고 나왔는데, 그 알만 부화가 되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은 곯아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어미 새의 모성은 곯은 알까지도 보듬고 싶었던 것이었을 겝니다.

드럼통에서 꺼내 온 새 집. 어미 새가 곯아버린 알을 지키고 있다
드럼통에서 꺼내 온 새 집. 어미 새가 곯아버린 알을 지키고 있다최성수
아이들은 새 집과 새 알이 신기한지, 한참을 그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라, 채연이 아빠도, 다른 식구들도 다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모두들 침묵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어미 새는 우리가 없는 일 주일 동안, 그 드럼통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잡을 것이겠지요. 그런데 난데없이 인간들이 나타나 집에 불을 질렀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실 시골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쓰레기 처리에 대한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거름으로 만들어 밭에 쓰기나 하지만, 다른 쓰레기는 분리수거 봉투에 넣어 버려도 제대로 수거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해 가기도 힘들테고, 마을 공동 쓰레기장에도 자주 수거를 할만큼의 양이 되지 않는데 일부러 쓰레기차가 올 리도 없지요.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드럼통을 하나씩 마련해 두고, 거기에 태울 수 있는 것을 태워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사촌 동생이 가져다 준 드럼통에 쓰레기를 태우곤 했는데, 새 집 사건이 난 후로는 마음이 영 언짢아서 그만 드럼통을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는 수거를 해가든 안 해가든, 쓰레기는 모아서 분리 수거 봉투에 넣어 마을 공동의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곤 합니다.

나는 눈 밭의 짐승 발자국을 보며 작년 여름 그 어미 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혹시 그 새의 발자국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밭을 더듬어 봅니다.

집 앞으로 돌아 나오는데, 마당가에 심은 느티나무와 벽오동, 산수유 나무에도 봄 햇살이 엉겨 있습니다. 밭의 눈과 나무에 어리는 햇살 사이에 계절의 경계가 있는 듯 합니다.

아내는 지난 설날 이 나뭇가지에 고기를 걸어놓았습니다. 설 상을 차리느라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던 아내가, 오후가 되자 부엌에서 무엇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다더니 어딜 가?"

내가 묻는데도 아내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궁금증이 일어 아내가 나간 뒤를 좇아 문 밖으로 나섰는데, 아내는 마당 가 나뭇 가지 사이에 무엇을 척척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뭘 하는 거요?"

내가 묻자 아내는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갈비에 붙어있던 기름덩이들이에요. 새들 먹으라고요."

음식 찌꺼기가 생기면 아내는 개울가나 밭에 던져주곤 했습니다. 겨울 먹이를 찾지 못한 짐승들 식량거리라도 되라고 그런 것입니다.

"짐승들만 먹게 할 수는 없잖아요. 새들도 배가 고플텐데."

아내는 그런 말을 변명처럼 덧붙이며 나뭇가지에 기름덩어리들을 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없는 사이, 새들이 그 기름덩어리를 다 먹었는지, 나뭇가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작년 여름의 그 어미 새와 새끼 새들도 그것을 먹었을까요?

그날 저녁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녀석의 말에 우리 부부는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뭐? 아무 소리도 안 나네."

그러자 녀석은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봐, 이상한 소리가 들리잖아."

녀석은 아예 소리가 나는 곳을 가리켰는데, 그곳은 부엌 가스 렌지 위였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가서 귀를 들이댔는데, 거기에서 일정하게 톡톡톡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잠시 멈췄다가는 다시 톡톡톡 하고 들렸습니다. 그것은 새 소리였습니다. 환풍구의 바깥 구멍을 통해 새가 렌지 후드 속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아하, 새가 추워서 집안으로 들어왔나 보다."

나는 늦둥이에게 설명을 해주고 손가락으로 탁탁 렌지 후드 아랫부분을 두드려 봅니다. 그러나 두드릴 때만 조용해지고는 이내 다시 톡톡톡 하는 소리가 납니다.

"환풍구 입구를 막아야겠어. 양파 자루 같은 것 없나?"

그런 내 말에 늦둥이 녀석이 한 마디 합니다.

"안돼. 그럼 새가 못 나가잖아."

그 말도 맞습니다. 새들이 어디 이곳이 인간의 거처라고 생각하고 피해 깃들이겠습니까? 아늑하고 포근하면 다 제 집 자리지요. 인간이 자연에 깃들여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인간이 이용하며 산다고 생각에서부터 환경 파괴니 오염이니 하는 비극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냥 우리 집이 아니라 새와 함께 사는 집, 나무와 풀과 바람과 더불어 사는 곳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깊게 패인 짐승 발자국 속에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깊게 패인 짐승 발자국 속에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최성수
그런 마음으로 렌지 후드 속의 새는 그대로 둔 채 마당가에 나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별이 쏟아질 듯 초롱초롱합니다. 바람도 제법 불지만, 그 바람 끝이 맵지 않고 훈훈합니다. 계절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빠, 하늘에 별이 있지. 근데 여기 땅에도 별이 있다. 봐, 반짝반짝하는 별이 많잖아. 여긴 지구별이야."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눈 위에 빛나는 별빛을 가리키며 종알댑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요? 나는 그런 녀석의 말속에, 아직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정말 봄이 가까이 오긴 온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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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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