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 돌베개 / 세계사 / 2001 / 9,000원권기봉
한편 해방 뒤 환국한 이후의 이야기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자신과 그가 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유리한 발언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해방 직후 당시 민중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던 여운형을 두고 “여운형이 박헌영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판단 근거는 찾아볼 수는 없었다. 친미반공주의와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장준하. 그의 사상적 편향성을 두고 목사 집안의 자식이고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명확한 인과관계는 발견하기 힘든 것 같다.
지엽적인 의문 하나 - 그는 왜 자원입대 후 바로 탈영했을까?
여기서 잠깐, 책을 읽으며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본 동양(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24세가 되던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그런데 장준하는 왜 아무도 가기 싫어하던 학도병에 자원입대했을까? 그는 말한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이유는 단지 “나의 집안에 닥칠 불행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 방파제로서 나를 스스로 설득시킨 결과”라고. 태평양 전쟁 말기 악랄해질 대로 악랄해진 일본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유로 보인다.
그런데 시원치가 않다. 장준하는 일본군에 자원입대 지 반년만인 1944년 7월 7일 병영을 탈출, 6천리 먼 길을 걸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갔다. 아예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일단 입대했다가 몰래 탈출하면 가족들에게 오히려 더 큰 피해가 미칠 것이 분명할 텐데, 그는 애초의 학도병 자원입대 이유를 버리고 탈출을 결행한 것이다.
이는 막상 일본군에 가담하고 보니 생각이 변한 결과일까? 아니면 막상 일본군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더 중요한 대의(大義)를 깨달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부터 일본군에 가담해 중국으로 간 다음 탈출을 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전후 상황을 보건대 마지막 상상은 적절치 않은 것 같으나, 장준하 역시 이에 대해 별 말이 없으니 속내를 명확히 알 길은 없다.
| | 사라진 <사상계>, 이제는 인터넷으로 만난다 | | | <사상계> 발간에서 폐간, 그리고 환생까지 | | | |
| | ▲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 | ⓒ장준하기념사업회 | |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는 원래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 <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상>은 대한민국 정부의 서기관에 임명된 장준하가 국민사상연구원의 기획 업무를 관장하면서 1952년 9월 창간한 월간지인데, 장준하는 이듬해 4월 이를 인수해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고 명실상부한 월간 종합교양지를 만들어 낸다.
이미 장준하는 1944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 머무를 때부터 1945년 광복군으로 잡지 <등불>과 <제단>을 발행하기까지 수차례 잡지를 만들어낸 바 있기에 <사상계> 창간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판으로 3천부가 발간된 <사상계>는 창간호부터 매진되는 등 특히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초기에는 1백면이던 것이 차차 4백면 내외로 증면되었다. 주로 민족통일문제와 민주사상 함양, 경제발전, 민족적 자존심 제고 등을 다뤘던 <사상계>는 특히 문예면에 비중을 두어 ‘신인문학상’과 ‘동인문학상’ 등을 제정, 신인 문인을 발굴하는 데 공헌을 했다.
그런데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특히 정권과의 대척점에 서게 되었고, 이후 발행인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부완혁이 발행을 맡는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탄압과 재정난 등으로 고전하다가 결국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오적>을 실으면서 폐간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발행인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통해 폐간 2년 뒤인 1972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사상계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사상계>는 더 이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재정난과 필자난, 정권과의 마찰을 원치 않는 인쇄소들의 인쇄 거부로 더 이상 잡지를 찍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폐간 28년만인 1998년 6월에 통권 206호를 발간했고, 이어 지난 2000년 6월호(통권 207호)도 냈다. 이처럼 월간지가 달마다 발간되지 않다가 근 2년이나 지난 2000년 6월에나 나온 이유는, 1996년 7월 발효된 새 정기간행물등록법이 ‘2년 이상 발행이 중단된 경우 등록이 취소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등록 취소라도 막기 위해 발행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상계>(www.sasangge.com)를 만날 수 있으며, 인터넷 ‘장준하기념사업회(www.peacewave.or.kr)’를 방문하면 장준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 권기봉 | | | | |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음,
돌베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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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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